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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나물 Jul 28. 2022

유러피안 사내 부부 도전기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면접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감과 열등감의 거리는 짧았고 나는 그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경력도 짧고, 석박사도 아니고, 업무 분야도 다른데 잘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영어로 일해야 하는데. 아냐,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근데 나 아니면 누굴 뽑겠어. 입을 다물고 있어도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남편이 말했다.


“모의 면접 봐줄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실은 순식간에 면접장이 되었다. 우리는 책상을 한가운데 두고 면접관과 지원자가 되어 마주 보고 앉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집어넣고 자기소개부터 시작.

“Hello, nice to meet you. My name is …”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다섯 마디 정도 지나자 말문이 턱 막혔다. 몇 번이고 중얼거렸던 문장들이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갑자기 시작된 면접에 긴장을 했는지 몸은 뻣뻣하게 굳어져갔다. 남편의 탈을 쓴 면접관이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다시 질문을 건넸다.


 “Tell me about your experience (경력에 대해 설명해 보세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이력서를 쓸 때 수없이 돌이켜보고 정리했던 내용이다. 하지만 이미 말려버린 페이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맥이 뚝뚝 끊겼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딴짓하고 있는 학생에게 갑자기 소리 내어 읽으라고 시킨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 채로 간신히 입을 뗐다.


 면접관은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다시 입을 열었는데.

 “어... 음….”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 질문을 몇 개 더 받았지만 두 마디를 넘기지 못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남편도 말문이 막힌 듯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했는데 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냐, 지금까지 대체 뭘 준비한 거냐고 묻는다. 억울함이 목 안쪽까지 차오르지만 듣고 보면 다 맞는 말이라 꾹 삼켰다.


 모의면접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낯선 외국인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나와 인터뷰 내내 이어지는 침묵, 이 자리를 마련해 준 장본인이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남편. 상상만 해도 겨드랑이가 축축해진다. 아무도 몰랐던 민낯이 드러난 기분. 당장이라도 숨고 싶었다. 쥐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싶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거실 책상에 앉아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울어버렸다.


 보다 못한 남편이 임시처방을 내려줬다. 한국어로 예상 답변을 적은 뒤에 그 내용을 다시 영어로 번역해 보라고 했다. 기본적인 작업을 이제 와서 시작한다니. 영어로 중얼거리고, 관련 뉴스 기사를 찾고, 논문을 읽으며 흡수한 내용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왜 뿔뿔이 흩어져서 내 혀끝으로 나오길 거부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켜고 예상 답변을 적어 내려갔다.


 면접 당일, 분위기는 무난했다. 예상했던 질문들이 나왔고, 이틀 동안 단단히 준비한 덕에 혀가 굳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면접관은 내가 다른 조직에 더 맞는 것 같다며 그쪽 팀장에게 얘기해놓겠다고 말하며 면접을 마쳤다.


 일주일이 지났다.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일하느라 바쁜가 보지. 이 주가 지났다. 왜 메일이 오지 않을까?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제야 인사과 직원이 연락하지 않는 이유가 실감 났다. 떨어졌구나. 남편은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당장 일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며 날 위로했다.


 괜찮다고 말했다.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예상과 다르게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당장 백수가 될 처지임에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야 내게 일어났던 이상한 일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2주 내내 준비했으면서 모의면접을 망쳐버린 이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내도 마음에 쏙 드는 지원 동기를 쓸 수 없었던 이유, 면접에서 탈락했지만 내심 안도했던 이유.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 홍보 영상을 보며 ‘나도 저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질 수 있어서, 사내 부부가 좋아서, 남이 바라보는 내가 멋져 보일 것 같아서. 남편과 같은 회사에 합격해서 해외로 나가면 제일 좋은 그림일 것이라고 착각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림의 관객은 내가 아니었다. 상상 속의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회사 사람들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새로운 직장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용기였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걱정 어린 말투로 안부를 묻고, 나는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린다.


 타인의 시선을 걷어내자 마음속 깊이 묻어놨던 것들이 고개를 든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걱정하면서도 그것들을 바라본다. 전처럼 애써 무시하지 않는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간질간질한 걸 보니 머지않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헤쳐나갈 거라는 예감이 든다.



Photo by Kristopher Roller on Unsplash


※ 매주 목요일 밤 새로운 글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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