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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나물 Aug 04. 2022

우리가 퇴사할 때 알게 되는 것

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되고

편지도 안 써도 되고

메일도 안 보내도 되고

메일도 안 읽어도 되고  

- 이랑, <환란의 세대>


 2021년 가장 많이 들은 곡 1위는 이랑의 ‘환란의 세대’다. 2분 38초부터 이랑이 맑은 목소리로 외치는 후렴구를 듣고 있으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족쇄들 - 이를테면 읽지 않은 메일, 업무 전화,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 - 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가슴이 갑갑할 때 이 노래를 들었다. 점점 이 곡을 자주 들었고, 언젠가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즈음부터 어떤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특별한 건 아니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렸을 법한 질문들이었다.

 

나는 정말 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몇 년 후에도 이런 모습일까


 이 질문들은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이내 고막을 터트리고 귓구멍으로 줄줄 나올 것만 같았다. 이것들은 내 머릿속에 어떤 압력을 가했고, 그 힘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건 자존감이었다. 안 그래도 물렁물렁하던 자존감은 그 힘을 버티다 못해 납작해졌다. 퇴사를 마음먹고 나자 이 질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머리 안에 존재하는 압력은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여전히 자존감을 짓누르고 있었다.


 퇴사 기념 회식을 했다. 팀장님 두 분과 같은 팀 사람 몇 명이 참석했다. 처음 가보는 양대창 집에서 모둠 세트를 시켜 불판에 구웠다. 고기 두어 점을 먹었을 때 팀장님은 일 잘하던 애를 홀랑 데리고 가면 어떻게햐냐며 남편을 장난스레 타박했다. 내가 무슨 업무를 하는지도 모르실 줄 알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사람들이 담배 피우러 간 사이, 과장님이 할 얘기가 있다면서 입을 뗐다.


 "우리가 일할 때 초심이 중요하다고 말은 많이 하는데 와닿지가 않잖아요? 다들 중요하다고만 하지. 근데 나물 씨를 보고 생각이 들었던 게, 나는 일을 할 때, 일의 리스트가 머릿속에 있고 그걸 언제까지 해야 하고 언제 누구한테 시키고 얼마나 걸릴지를 보통 계산해놓거든요. 어느 날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 두 시간이면 하겠다 싶은 일이 있어서 두 시간만 야근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물 씨가 퇴근 시간에 그걸 해서 딱 주는 거야. 내가 준 일도 아니었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너어어어어어무 놀랬고, 어, 너어어어무 놀랬어. 왜냐면 여태 그런 사람이 없었거든. 그 뒤로 ‘나도 이렇게 일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야. 그때 딱 초심이라는 게 생각나면서, 나는 어떻게 일하는지 돌아보게 됐었던 것 같아. 그 뒤로 팀장님이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더 생각하게 됐어. 그때 진짜 놀랬어. 나물 씨랑 같이 일하면서 배웠던 점이 바로 그거야. 그래서 나도 일하는 방식이 조금 바뀌었던 것 같아. 아니, 바뀌었지.”


 술기운 때문인지 귀를 열어놓은 채 멍하니 테이블에 남은 반찬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내 이야기가 맞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이야기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진심 어린 칭찬 해주셔서 감사해요.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요. 다른 사람에게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고개만 끄덕거리다 '과장님이 더 고생하셨는걸요.'라고만 얘기했다.


 그날 자리를 파하던 중 예전에 같이 일했던 팀장님이 별거 아니라며 쇼핑백을 하나 쥐어주셨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한지에 곱게 포장된 회색 목도리가 담겨있었다. 취향을 타지 않으면서도 먼 곳을 떠날 때 짐이 되지 않을 만한 걸 고민했을 팀장님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다음날 아침,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카톡창을 켰다. 평소 같았으면 감사하다는 말과 이모티콘 하나만 보내고 끝냈을 텐데 더 이상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전날 회식자리에서 진심이 담긴 말을 들은 이상 나도 누군가에게 진심을 말해야 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길게 쓰고 나서 잠시 고민하다 마지막에 한 문장을 더 적었다. 팀장님을 뵐 때마다 더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고.


 퇴사할 때가 돼서야 알게 된다. 티 나지 않게 일한 서로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심 어린 칭찬 한 마디를 듣는 게, 마음속에만 있던 진심을 전하고 받는 게, 어쩌면 그걸로 충분할지도 모른다고. 그제야 자존감을 누르고 있던 압력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따뜻한 마음



Photo by Jason Leung on Unsplash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얼른 회복하여 한 주 뒤(8/18)에  좋은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건강하고 무탈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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