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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나물 Sep 15. 2022

파슬리가 된 아내를 껴안고 울었다

 금요일 저녁, 우리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남편은 새로 이직한 회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막상 다녀보니 실망한 점들이 하나 둘이 아니며, 심지어 누군가가 본인의 의견을 비꼬기까지 했다는 게 요지였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날 저녁 누군가는 귀가 간지러워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의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비슷한 말들을 계속하였다.


 하루가 지나고 아무 계획 없는 주말이 왔다. 점심과 저녁 모두 배달시켰다. 저녁으로 시킨 피자 배달원이 초인종을 누를 때가 돼서야 허겁지겁 점심에 먹었던 배달용기들을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피자와 맥주 한 캔 씩 먹은 뒤 남편은 컴퓨터 게임을 시작했고, 술이 약한 나는 안방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을 땐 남편이 나를 껴안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고 싸운 뒤 화해할 타이밍에 나올 법한 포옹의 세기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이 벌게져 있었다.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는 사람인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구석에 시들어버린 파슬리를 봤는데 그 모습이 너처럼 느껴져서 너무 슬펐어. 내가 널 뿌리째 뽑아서 데려온 건 아닐까, 말없이 시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그럴 때 나조차도 눈치 못 채면 어떻게 해. 오늘 하루 종일 배달음식만 먹고 게임만 하다가 갑자기 널 방치해버린 것만 같았어. 내가 선택해놓고 너무 애처럼 굴었지. 주말인데 너무 게으르게 살아서 미안해. 그래서 네가 자는 동안 쓰레기도 치우고 설거지도 했어."


 얼마 전 마트에서 파슬리 모종을 사 왔다. 싱싱한 잎을 바로 따다 요리에 쓰고 싶었다. 하지만 파슬리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시들었고, 빳빳했던 줄기는 힘을 잃어 바닥에 고꾸라졌다. 거실 구석에 일주일째 방치되어 쓰레기통으로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넓은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파슬리는 처음 키워보는 거라 물 조절을 못해서 그래. 새로 사야 할 것 같아. 근데 나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해, 정말이야. 자존감이 낮아질 때는 꼭 너한테 말할게."


 해외로 나오기로 결정한 건 오로지 남편의 커리어를 위해서였다. 자신의 일을 좋아했고 심지어 잘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하나만 찾기도 힘든 세상에서 그는 운 좋게도 첫 직업에서 둘 다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허황된 욕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의지였다. 그의 도전은 응원받아야 마땅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용기도 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족과 해외로 나온다는 건 부수적인 문제가 딸려온다. 가족 구성원의 커리어 단절, 소득 감소, 그리고 심리적으로 문제까지. 최악의 시나리오는 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다. 해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자존감이 서서히 낮아지다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남편을 원망하게 되는 결말. 돈은 적게 벌어도 괜찮으니 그런 순간은 만들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었다. 


 자신의 의지로 먼 곳까지 떠나왔으면서 불평만 늘어놓았던 어제의 모습이 부끄러워진 걸까. 그는 내 티셔츠에 얼굴을 비볐다. 팔십 키로나 되는 사내가 우는 걸 보니 가여웠고 귀엽기도 했다. 


 우리는 침대에서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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