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다니면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넌 라식 안 해? 하면 훨씬 예쁠 텐데.” 수술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 그다음 꼭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렌즈는?” 그러면 렌즈를 끼고 나서 눈이 얼마나 건조했는지, 밤마다 얼마나 빨갛게 충혈됐는지, 통증은 어땠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말한다. “아~그렇구나.” 대화는 싱겁게 끝이 난다. 궁금증을 해결한 상대방은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지만, 내 기분은 대체로 찝찝하다. 호기심으로 위장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질문에 평가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자주 내게 묻곤 했다.
평가를 당할 때마다 타인의 시선에 나를 비추어 보았다. ‘꼭 눈 수술을 해야 하는 걸까. 수술을 받고 나면 편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냥 안경 끼고 살아가도 상관없지 않나. 여자는 안경을 쓰면 안 되는 걸까.’ 안경 외에도 평가 대상에 오르내리는 요소는 다양하다. 행동거지와 옷차림, 말 한마디. 무엇이든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좋아하는 작가, 율리체는 <잠수 한계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로에 관해 평가를 내리는 일이 나는 아주 싫었다. 그건 중독이다. 저주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서로에 관해 내린 평가로 이루어진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독일을 떠났다. 평가를 내리는 자와 평가를 받는 자가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고, 각자가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중 한 역할을 수행한다.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배경에는 평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친구와 직장 동료, 그리고 가족 친지 모두 예외 없이 서로를 평가했다. 우리는 애정과 염려, 호기심으로 얇게 포장된 평가를 주고받았다. 이 행위는 의도와 관계없이 이루어졌으며, 때때로 상처를 남기거나 상대방에게 감옥을 선사했다. 평가받는 입장일 땐 최대한 평범한 척해야 했고, 평가하는 입장일 땐 온갖 편견에 사로잡혀 꼼꼼히 점수를 매겼다.
해외에 살게 되면서 이 지독한 행위에서 자유로워졌다. 회사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 가까웠던 이들과 멀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을 벗어나서 그런 걸까. 가장 큰 변화는 외모에 대한 평가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곳 사람들은 외모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고, 혹시나 말하게 되더라도 뷰티풀과 나이스가 섞이지 않은 말은 내뱉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채식주의자도, 곤충을 좋아하는 사람도 유별나다는 식의 태도로 대하지 않는다. 대화 후에 찝찝함이 남지 않으므로 만남은 경쾌해진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신나게 얘기할 기회가 생긴다. 불면증과 우울함을 토로해도 우리의 관계는 무거워지지 않는다. 평가하지 않는다는 건 곧 자유를 선사하는 일이다. 투명하게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 하루에도 수십 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세상에서 자유를 꿈꿀 수 있는 틈이 생긴다. 그 틈을 우리가 서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행위는 꽤 근사하고 멋진 일이다.
※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음주(11/4)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