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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나물 Oct 13. 2022

지미추와 쪼리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쯤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점심 같이 먹을래?’ 알겠다고 답장을 보내자마자 고양이 세수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회사 옆 건물에 위치한 푸드코트에서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연어 샐러드를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 앞에 줄을 섰고, 앞에는 서너 명의 대기자가 있었다. 맨 앞에는 키가 185쯤 되는 여자가 있었는데 남편과 눈을 마주치더니 인사를 했다. 회사 사람이었다. (아, 옷이라도 좀 제대로 입고 나올걸.) 몇 분 뒤 바로 뒤에 누군가 줄을 섰는데, 그 여자도 남편과 인사를 했다. 복슬복슬한 긴 금발머리에 멋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네이비색 원피스에 또각 구두, 게다가 영국식 발음까지. 마치 헤르미온느가 나타난 것 같았다. 남편은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남편의 팀장이었다. (하필 오늘)


 말로만 듣던 팀장이구나. 처음 만난 날이었지만 그녀는 10년 만에 겨우 연락이 닿아 만난 친구처럼 내게 인사했다. 나도 괜히 목소리 톤을 높이고 눈을 크게 치켜떠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얘기 많이 들었다며 무슨 글을 쓰냐고 물었다.


"소설?"

"아니 그냥 논픽션이야."

"어떤 거 써? 너무 흥미롭다. 정말 멋있어!"

"음, 내가 느낀 것들을 써."

"진짜 멋있다. 그나저나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 거야? 나는 쇼핑 왕창 할 거야. 지미추 신어봤어? 이거 지미춘데 너도 진짜 꼭 신어봐. 발이 진짜 편하다니까."

"(지미추 잘 모르는데) 아 그래? 그렇구나! 정말 예쁘다! 알았어! (근데 나 발톱은 깎았나? 괜히 쪼리 신고 나왔네. 맨발인데 너무 부끄럽다, 다리털은 밀었나)"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계속 얘기한 걸 보면) 지미추 얘기를 이어나갔다. 어느새 난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꼭 신어볼게!"

"그래서 달링, 오후엔 뭐 할 거야?"

"나 그냥…."


 얼버무렸다. 어디서 돈을 받고 연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낸 것도 아닌데 글 쓴다고 말해도 될까. 당당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좋네! 만나서 너무 반가웠어. 점심 맛있게 먹고 다음에 또 보자 허니!’라고 말한 뒤 샐러드 박스를 들고 선글라스를 끼고선 유유히 사라졌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밥을 먹는데 오늘따라 정수리에 딱 붙은 머리카락이 신경 쓰였다. 제멋대로 뻗친 잔머리와 다듬지 않은 눈썹 한 올 한 올이 부끄러웠다. 오후에 뭐 하냐는 질문에 제대로 말하지 못한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밥 먹고 집 가는 길에 마트에서 치약과 햄을 샀는데, 그마저도 싫었다. 정말 백수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미추는 얼마나 편한 걸까. 내 쪼리는 어쩜 그렇게 한순간에 초라해진 걸까. 비싼 슬리퍼를 신고 나갔으면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을까. 머리라도 감고 나왔으면 괜찮았을까. 종아리 털이라도 밀었으면 덜 움츠러들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아내는 무슨 일 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남편은 늘 나를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내 글을 제대로 읽기 전부터 한 치의 의심 없이 작가라고 말했다. 나에 대해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남편은 그날 저녁 당당해져도 된다며 위로를 해주었다.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볼품없게 여긴 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되려 기억 속 어딘가에 선명하게 박제되었다. 그때의 나를 보듬기 위해서 글을 쓴다. 매일매일 쓴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초라한 나에 대해 쓴다.



Photo by Jairo Alzat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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