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슬리가 된 아내를 껴안고 울었다'
처음 하는 일은 어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박참새의 대담집 '출발선 뒤의 초조함'을 읽습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새: 그런데 아까 말씀해주신 것처럼, 창작의 완성은 노출이잖아요. 하지만 세상에 나의 것을 내보이는 일에는 만드는 것과 별개로 엄청난 용기와 대범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를 드러내 보이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겨울: 저는 딱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내가 별로라는 인정.
수정 후
회사를 관두면서 자존감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땐 매월 25일마다 내가 일한 만큼 월급이 들어왔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정량적인 수단이었다. 나는 그 돈을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고, 즐기는 데에 사용했다. 월급은 자존감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유지시켜주는 안전장치였다. 회사를 관두고 나서 월급은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은 새로운 회사로 출근을 했고, 나는 예전보다 집안일을 조금 더 많이 담당하게 되었다. 자존감을 지켜주던 안전장치는 더 이상 없다.
나의 쓸모를 의심하다가 우울해지고 자존감이 낮아지면 어떻게 해야되나, 괜히 객기를 부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때때로 자존감이 낮아질 때도 있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우울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꽉 막힌 공간에 갇혀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면 지금은 무한하고 광활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날 지탱해주는 요소들을 찾아가고 있다. 그중 한 가지를 찾은 날,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평범한 금요일 저녁이었다. 퇴근하는 남편과 만나 집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걸어서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고, 걸어가는 길에 남편은 새로운 회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식당 테이블에 앉을 때도 남편의 불평불만은 계속되었다. 기대했던 회사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운 점들이 많고, 심지어 회의 시간에 어떤 사람이 본인의 의견을 비꼬기까지 했다는 게 요지였다. 나는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으며 말했다. 아직 회사가 준비가 많이 안됐네. 음식을 여러 번 씹고 삼킨 뒤에 말했다. 그 사람이 널 몰라서 그래,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얼른 맛있게 먹어. 저녁을 다 먹고 집에 돌아와서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똑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꾸어 얘기하다가 잠에 들었다.
토요일이 되었다. 아무 계획이 없는 주말답게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다가 게임을 하다가 유튜브를 시청했다. 끼니는 배달로 해결했다. 주말을 충실하게 살았는지는 배달 횟수로 판단 가능하다. 배달을 많이 시킨 주말일수록 삶의 주도권을 잃고 게으르게 보냈다는 의미다. 그날은 이미 점심과 저녁 모두 배달로 해결했다. 게다가 저녁 배달이 왔을 때 허겁지겁 점심에 먹은 배달 용기들을 테이블 구석으로 밀었다. 피자와 맥주 한 캔 씩 먹은 뒤 남편은 컴퓨터 게임을 시작했고, 술이 약한 나는 안방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깼는데 이불속에서 체온과 부피감이 느껴졌다. 남편이 나를 세게 껴안고 있었다. 마치 언성을 높이고 싸운 뒤 화해할 때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이 벌게져 있었다. 좀처럼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는 사람인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구석에 시들어버린 파슬리를 봤는데 그 모습이 너처럼 느껴져서 너무 슬펐어. 내가 널 뿌리째 뽑아서 데려온 건 아닐까, 말없이 시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그럴 때 나조차도 눈치 못 채면 어떻게 해. 오늘 하루 종일 배달음식만 먹고 게임만 하다가 갑자기 널 방치해버린 것만 같았어. 내가 선택해놓고 너무 애처럼 굴었지. 주말인데 너무 게으르게 살아서 미안해. 그래서 네가 자는 동안 쓰레기도 치우고 설거지도 했어."
얼마 전 마트에서 파슬리 모종을 사 왔다. 싱싱한 허브를 식탁에서 바로 따다가 요리에 넣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파슬리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시들었고, 빳빳했던 줄기는 힘을 잃어 바닥에 고꾸라졌다. 결국 거실 구석에 일주일째 방치되어 쓰레기통으로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남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파슬리는 처음 키워보는 거라 물 조절을 못해서 그래. 새로 사야 할 것 같아. 근데 나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해, 정말이야. 자존감이 낮아질 때는 꼭 너한테 말할게."
해외로 나오기로 결정한 건 오로지 남편의 커리어를 위해서였다. 자신의 일을 좋아했고 심지어 잘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하나만 찾기도 힘든 세상에서 그는 운 좋게도 첫 직업에서 둘 다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허황된 욕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의지였다. 그의 도전은 응원받아야 마땅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용기도 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족과 해외로 나오게 되면 부수적인 문제가 딸려온다. 가족 구성원의 커리어 단절, 소득 감소, 그리고 심리적으로 문제까지. 최악의 시나리오는 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다. 해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자존감이 서서히 낮아지다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남편을 원망하게 되는 결말. 돈은 적게 벌어도 괜찮으니 그런 순간은 만들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었다.
자신의 의지로 먼 곳까지 떠나왔으면서 불평만 늘어놓았던 어제의 모습이 부끄러워진 걸까. 그는 내 티셔츠에 얼굴을 비볐다. 팔십 키로나 되는 사내가 우는 걸 보니 가여웠고 귀엽기도 했다.
우리는 침대에서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게으른 주말에 잠을 자다가도 나를 지탱해주는 것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염려하고 지켜봐 주는 마음은 그 어떤 안전장치보다 강력하다. 깊은 곳으로 추락하다가도 언제든 추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혹시나 먼 미래에 날 지탱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날을 대비하여 그날의 기록을 남겨 놓는다.
수정 내역
회사를 관두면서 자존감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땐 매월 25일마다 내가 일한 만큼 월급이 들어왔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정량적인 수단이었다. 나는 그 돈을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고, 즐기는 데에 사용했다. 월급은 자존감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유지시켜주는 안전장치였다. 회사를 관두고 나서 월급은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은 새로운 회사로 출근을 했고, 나는 예전보다 집안일을 조금 더 많이 담당하게 되었다. 자존감을 지켜주던 안전장치는 더 이상 없다.
나의 쓸모를 의심하다가 우울해지고 자존감이 낮아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괜히 객기를 부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며 자존감이 낮아질 때도 있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우울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꽉 막힌 공간에 갇혀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면 지금은 무한하고 광활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날 지탱해주는 요소들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중 한 가지를 찾은 날,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 추가)
금요일 저녁, 우리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다. → 평범한 금요일 저녁이었다. 퇴근하는 남편과 만나 집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굳이 근사한 레스토랑일 필요가 없어서 수정) 테이블에 앉자마자 남편은 새로 이직한 회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막상 다녀보니 실망한 점들이 하나 둘이 아니며, 심지어 누군가가 본인의 의견을 비꼬기까지 했다는 게 요지였다. → 식당은 걸어서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고, 걸어가는 길에 남편은 새로운 회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식당 테이블에 앉을 때도 남편의 불평불만은 계속되었다. 기대했던 회사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운 점들이 많고, 심지어 회의 시간에 어떤 사람이 본인의 의견을 비꼬기까지 했다는 게 요지였다. 나는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으며 말했다. 아직 회사가 준비가 많이 안됐네. 음식을 여러 번 씹고 삼킨 뒤에 말했다. 그 사람이 널 몰라서 그래,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얼른 맛있게 먹어. 저녁을 다 먹고 집에 돌아와서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똑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꾸어 얘기하다가 잠에 들었다. (상황 묘사 자세하게 수정)
테이블에 앉자마자 남편은 투덜대기 시작했다. 새로 이직한 회사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실망한 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둥, 오늘 회의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비꼬는 말투로 자기를 대했다는 것이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날 저녁 누군가는 귀가 간지러워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의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비슷한 말들을 계속하였다.
하루가 지나고 아무 계획 없는 주말이 왔다. 점심과 저녁 모두 배달시켰다. 저녁으로 시킨 피자 배달원이 초인종을 누를 때가 돼서야 허겁지겁 점심에 먹었던 배달용기들을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 토요일이 되었다. 아무 계획이 없는 주말답게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다가 게임을 하다가 유튜브를 시청했다. 끼니는 배달로 해결했다. 주말을 충실하게 살았는지는 배달 횟수로 판단 가능하다. 배달을 많이 시킨 주말일수록 삶의 주도권을 잃고 게으르게 보냈다는 의미다. 그날은 이미 점심과 저녁 모두 배달로 해결했다. 게다가 저녁 배달이 왔을 때 허겁지겁 점심에 먹은 배달 용기들을 테이블 구석으로 밀었다. (게으른 주말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피자와 맥주 한 캔 씩 먹은 뒤 남편은 컴퓨터 게임을 시작했고, 술이 약한 나는 안방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을 땐 남편이 나를 껴안고 있었다. → 잠에서 깼는데 이불속에서 체온과 부피감이 느껴졌다. 남편이 나를 세게 껴안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고 싸운 뒤 화해할 타이밍에 나올 법한 포옹의 세기였다. → 마치 언성을 높이고 싸운 뒤 화해할 때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어색한 표현 및 상황 묘사 수정)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이 벌게져 있었다. 좀처럼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는 사람인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구석에 시들어버린 파슬리를 봤는데 그 모습이 너처럼 느껴져서 너무 슬펐어. 내가 널 뿌리째 뽑아서 데려온 건 아닐까, 말없이 시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그럴 때 나조차도 눈치 못 채면 어떻게 해. 오늘 하루 종일 배달음식만 먹고 게임만 하다가 갑자기 널 방치해버린 것만 같았어. 내가 선택해놓고 너무 애처럼 굴었지. 주말인데 너무 게으르게 살아서 미안해. 그래서 네가 자는 동안 쓰레기도 치우고 설거지도 했어."
얼마 전 마트에서 파슬리 모종을 사 왔다. 싱싱한 잎을 바로 따다 요리에 쓰고 싶었다. → 싱싱한 허브를 식탁에서 바로 따다가 요리에 넣기 위해서였다. (어색한 표현 수정) 하지만 파슬리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시들었고, 빳빳했던 줄기는 힘을 잃어 바닥에 고꾸라졌다. 결국 거실 구석에 일주일째 방치되어 쓰레기통으로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넓은 남편의 (굳이 넓다는 표현은 필요 없어서 생략)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파슬리는 처음 키워보는 거라 물 조절을 못해서 그래. 새로 사야 할 것 같아. 근데 나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해, 정말이야. 자존감이 낮아질 때는 꼭 너한테 말할게."
해외로 나오기로 결정한 건 오로지 남편의 커리어를 위해서였다. 자신의 일을 좋아했고 심지어 잘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하나만 찾기도 힘든 세상에서 그는 운 좋게도 첫 직업에서 둘 다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허황된 욕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의지였다. 그의 도전은 응원받아야 마땅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용기도 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족과 해외로 나온다는 건 → 가족과 해외로 나오게 되면 (주어가 어색해서 수정) 부수적인 문제가 딸려온다. 가족 구성원의 커리어 단절, 소득 감소, 그리고 심리적으로 문제까지. 최악의 시나리오는 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다. 해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자존감이 서서히 낮아지다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남편을 원망하게 되는 결말. 돈은 적게 벌어도 괜찮으니 그런 순간은 만들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었다.
자신의 의지로 먼 곳까지 떠나왔으면서 불평만 늘어놓았던 어제의 모습이 부끄러워진 걸까. 그는 내 티셔츠에 얼굴을 비볐다. 팔십 키로나 되는 사내가 우는 걸 보니 가여웠고 귀엽기도 했다.
우리는 침대에서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게으른 주말에 잠을 자다가도 나를 지탱해주는 것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염려하고 지켜봐 주는 마음은 그 어떤 안전장치보다 강력하다. 깊은 곳으로 추락하다가도 언제든 추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혹시나 먼 미래에 날 지탱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날을 대비하여 그날의 기록을 남겨 놓는다. (마무리 문단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