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가는 날'
일기처럼 썼던 글을 수필처럼 쓰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수정 후
초등학생 시절의 평범했던 저녁 날, 전화벨이 울렸다. 당시 나는 전화를 먼저 걸 용기는 없었지만 전화를 받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거실 한 구석에서 놀다가 벨 소리를 듣고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나물이니? 엄마 집에 있지, 바꿔줄래? 친할머니였다. 엄마! 할머니한테 전화 왔어. 엄마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네, 네..., 네네, 네. 엄마는 대답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고, 그 자리에서 양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날 아빠는 퇴근하기 전이었고, 오빠는 놀이터나 학원에 가서 오지 않은 상태였다. 집 안에는 엄마와 나뿐이었다. 나는 위로를 한답시고 엄마의 팔을 잡고 흔들며 왜 우냐고 물었다. 당시에는 영문을 모른 채 상대를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몇 달 뒤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갔고, 친할머니와 고모는 커다란 칼국수집을 차렸다.
그날 엄마도 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로도 엄마는 자주 울었다. 스무 살이 된 오빠가 입대했을 때, 오빠가 코를 하도 골아서 옆으로 누워 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대학교를 다녀본 적 없는 오빠가 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에 놀러 와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여기 다니는 애들은 자유로워 보여.'라고 말했을 때, 나와 오빠가 짐을 싸서 각자 독립을 하고 엄마 혼자 거실에 남겨졌을 때.
엄마는 기쁠 때도 잘 울었다. 극적인 소식이 있을 때마다 엄마의 눈물샘은 어김없이 터졌다. 나는 그런 엄마의 성정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두더지의 살갗처럼 약한 마음이 녹아내리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남자 친구 앞에서 울었으나, 엄마 앞에서는 울지 않게 되었다.
이번에도 엄마는 울 게 뻔했다. 내가 유럽으로 떠나고 나면, 엄마는 거실에 혼자 앉아 눈동자가 빨개지고, 그다음 콧방울이 빨개지고, 그다음 코를 훌쩍일 것이다. 휴지를 몇 장 뽑아 코를 닦고 눈물을 닦아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비행기를 타는 날이 다가왔다.
오후 여섯 시, 미리 꺼내 두었던 니트와 패딩을 껴입었다. 배꼽까지 올라오는 이민가방과 캐리어 두 개, 백팩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공항으로 향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차 안은 조용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제외하면 진공에 가까울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다. 한숨 자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셋이 살 던 집에 둘만 남겨질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까. 인천대교를 건널 땐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시부모님 차를 타고 온 남편도 거의 같은 시간에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양손에 짐을 끌고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짐을 부쳤고, 탑승권을 받았다.
이제 보안 검사를 통과하고 출국 심사를 마치면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미소를 머금고 인사하는 것뿐.
“잘 다녀올게요.”
“그래, 너희 둘이 잘 이겨내리라 믿어. 마스크 잘 쓰고, 코로나 조심하고.”
아버님은 평소에도 코로나에 관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시고 우리에게 매번 '조심해라, 외식하지 마라, 사람 많은 데 가지 마라, 마스크는 꼭 KF94로 써야 한다, 택배 상자도 하루 뒀다 뜯어라'라고 말하셨다. 오늘만큼은 아버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참는 게 눈에 보였다. 부모님들도 우리도 어엿하게 인사를 나눈다. 여기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엄마다. 서른이 넘은 직업 군인 아들이 휴가 나왔다가 들어갈 때면 어김없이 우는 우리 엄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한다. 유리알 같은 눈물이 엄마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직접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몰려온다. 나는 꿋꿋한 어른이라도 된 양 엄마를 껴안으며 말했다.
“좋은 일로 떠나는 건데 왜 울어. 영상통화 자주 하면 되지. 못 보는 것도 아닌데.”
품 안에 들어온 엄마의 작은 어깨는 당장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가 출국장에 들어갈 동안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고, 시부모님과 아빠는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었다. 출국장을 통과하니 분위기는 차분해졌다. 문을 닫은 면세점이 있었고, 피로와 설렘이 반쯤 섞인 공기를 마셨다.
크로아티아에 온 지 반년이 넘은 지금, 엄마는 그동안 몇 번이나 울었을까. 가끔 엄마의 눈물로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를 떠올린다. 빨래가 금방 마르는 한여름날에도 마르지 않는 깊은 곳. 이제야 고백하지만 어릴 적엔 이곳을 싫어했다. 바라보고 있으면 연약해지는 기분이 들어 보고도 모른 척했다. 나는 저렇게 웅덩이를 만들지 말아야지 다짐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날 뱃속에 품었을 때의 나이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연약해서가 아니라 사랑할 땐 누구나 다 웅덩이 하나쯤 만들어낸다는 것을. 내 세계를 다정하게 만들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엄마의 웅덩이였다.
수정 내역
초등학생 시절의 평범했던 저녁 날, 전화벨이 울렸다. 당시 나는 전화를 먼저 걸 용기는 없었지만 전화를 받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거실 한 구석에서 놀다가 벨 소리를 듣고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나물이니? 엄마 집에 있지, 바꿔줄래? 친할머니였다. 엄마! 할머니한테 전화 왔어. 엄마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네, 네..., 네네, 네. 엄마는 대답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고, 그 자리에서 양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날 아빠는 퇴근하기 전이었고, 오빠는 놀이터나 학원에 가서 오지 않은 상태였다. 집 안에는 엄마와 나뿐이었다. 나는 위로를 한답시고 엄마의 팔을 잡고 흔들며 왜 우냐고 물었다. 당시에는 영문을 모른 채 상대를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몇 달 뒤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갔고, 친할머니와 고모는 커다란 칼국수집을 차렸다.
그날 엄마도 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로도 엄마는 자주 울었다. 스무 살이 된 오빠가 입대했을 때, 오빠가 코를 하도 골아서 옆으로 누워 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대학교를 다녀본 적 없는 오빠가 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에 놀러 와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여기 다니는 애들은 자유로워 보여.'라고 말했을 때, 나와 오빠가 짐을 싸서 각자 독립을 하고 엄마 혼자 거실에 남겨졌을 때.
엄마는 기쁠 때도 잘 울었다. 극적인 소식이 있을 때마다 엄마의 눈물샘은 어김없이 터졌다. 나는 그런 엄마의 성정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두더지의 살갗처럼 약한 마음이 녹아내리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남자 친구 앞에서 울었으나, 엄마 앞에서는 울지 않게 되었다.
이번에도 엄마는 울 게 뻔했다. 내가 유럽으로 떠나고 나면, 엄마는 거실에 혼자 앉아 눈동자가 빨개지고, 그다음 콧방울이 빨개지고, 그다음 코를 훌쩍일 것이다. 휴지를 몇 장 뽑아 코를 닦고 눈물을 닦아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비행기를 타는 날이 다가왔다.
오후 여섯 시, 미리 꺼내 두었던 니트와 패딩을 껴입었다. 배꼽까지 올라오는 이민가방과 88리터 캐리어, 그리고 기내용 캐리어와 → 캐리어 두 개, (간략히 수정) 백팩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 부모님 차에 → 차 트렁크에 (굳이 부모님 차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수정) 짐을 싣고 공항으로 향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차 안은 조용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제외하면 진공에 가까울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다. 한숨 자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셋이 살 던 집에 둘만 남겨질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까. 인천대교를 건널 땐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시부모님 차를 타고 온 남편도 거의 같은 시간에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양손에 짐을 끌고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짐을 부쳤고, 탑승권을 받았다.
항공사 직원은 편도행 티켓인 걸 확인하더니 짐짓 당황한 듯했다.
“죄송하지만 혹시 거주 목적으로 가시는 거예요?”
“네, 남편이 거기 회사에서 일하게 돼서요.”
근로 허가를 나타내는 서류 한 장을 보여주었다.
“잠시만요.”
직원은 주변에 있던 동료들을 부르더니 얘기를 나눴다. 작게 말해서 들리진 않았지만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대 안 좋은 소식인 게 분명했다. 직원은 한참을 얘기하더니 날 보며 말했다. “아내분께서는 힘드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뭐가 힘들다는 건지. 비행기를 탈 수도 없다는 걸까.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이 닥치자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대고 있었다. 직원도 확실하지 않았는지 일단 알겠다며 탑승권을 끊어주었다. 가방들을 맡기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저 멀리서 부모님 네 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권과 탑승권을 손에 쥐고 다 같이 출국장으로 향했다.
(필요 없는 장면이라 삭제. 일기처럼 시간 순서대로 쓰다 보니 불필요한 장면들을 넣게 되었습니다.)
이제 보안 검사를 통과하고 출국 심사를 마치면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미소를 머금고 인사하는 것뿐.
“잘 다녀올게요.”
“그래, 너희 둘이 잘 이겨내리라 믿어. 마스크 잘 쓰고, 코로나 조심하고.”
아버님은 평소에도 코로나에 관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시고 우리에게 매번 '조심해라, 외식하지 마라, 사람 많은 데 가지 마라, 마스크는 꼭 KF94로 써야 한다, 택배 상자도 하루 뒀다 뜯어라'라고 말하셨다. 오늘만큼은 아버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참는 게 눈에 보였다. 부모님들도 우리도 어엿하게 인사를 나눈다. 여기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엄마다. 서른이 넘은 직업 군인 아들이 휴가 나왔다가 들어갈 때면 어김없이 우는 우리 엄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한다. 유리알 같은 눈물이 엄마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직접 보고 있자니 식도 한가운데 죄책감이 걸린다. → 죄책감이 몰려온다.(표현이 어색해서 수정) 이런 마음을 감추고 (불필요한 표현 생략) 나는 꿋꿋한 어른이라도 된 양 엄마를 껴안으며 말했다.
“좋은 일로 떠나는 건데 왜 울어. 영상통화 자주 하면 되지. 못 보는 것도 아닌데.”
품 안에 들어온 엄마의 작은 어깨는 당장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가 출국장에 들어갈 동안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고, 시부모님과 아빠는 온 힘을 다해 괜찮다는 표정을 짓고 → 미소를 짓고 (표현이 어색해서 수정) 손을 흔들었다. 출국장을 통과하니 분위기는 차분해졌다. 문을 닫은 면세점이 있었고, 피로와 설렘이 반쯤 섞인 공기를 마셨다. → 보안 검색대와 출국장을 통과하고 나니 문을 닫은 면세점과 적당히 들뜬 여행객들이 보였다. 피로와 설렘이 반쯤 섞인 공기를 마셨다. (풍경 묘사가 먼저 오게 수정) 게이트를 향하는 길에 직원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내분께서는 힘드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크로아티아까지 갔는데 도착하자마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다. 입국 심사 때 보여줄 서류들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잠시 후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필요 없는 부분 삭제)
크로아티아에 온 지 반년이 넘은 지금, 엄마는 그동안 몇 번이나 울었을까. 가끔 엄마의 눈물로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를 떠올린다. 빨래가 금방 마르는 한여름날에도 마르지 않는 깊은 곳. 이제야 고백하지만 어릴 적엔 이곳을 싫어했다. 바라보고 있으면 연약해지는 기분이 들어 보고도 모른 척했다. 나는 저렇게 웅덩이를 만들지 말아야지 다짐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날 뱃속에 품었을 때의 나이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연약해서가 아니라 사랑할 땐 누구나 다 웅덩이 하나쯤 만들어낸다는 것을. 내 세계를 다정하게 만들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엄마의 웅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