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는 리어카를 끌었다. 할아버지는 낚시용 메쉬 조끼를 입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매일 전봇대 옆에 물건을 버렸고, 슈퍼마켓 직원은 매일 뒷문에 종이박스를 버렸기에 할아버지는 매일 집 밖을 나섰다. 리어카가 가득 차면 동네에 하나뿐인 고물상으로 향했다. 종이는 종이대로, 고철은 고철대로 무게를 재서 현금으로 바꾸었다. 리어카에서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건 종이박스였다. 종이가 제일 값이 싼 재료라는 걸 할아버지 덕에 알았다.
할아버지는 쓰레기만 주워온 건 아니었다. 가끔씩 박카스나 명절용 스팸세트를 들고 왔다. 마음씨 좋은 약사와 마트 직원들이 사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실은 멀쩡한 자식이 여섯이나 되고, 그중 넷은 같은 동네에 살고, 아내가 차려주는 삼시 세끼를 먹으며, 흰밥 위에 비싼 새우젓을 올려먹는다는 사실을.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리어카를 버리고 싶어 했다. 굶어 죽을 형편도 아니면서 고물을 줍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젊을 때 열심히 일했으면 모를까. 며칠에 한 번씩 소주를 진탕 마시고 돈도 제대로 벌어오지 않던 아버지가 일흔이 다 되어 저러니 속이 터질 법도 했다. 여차해서 사고라도 나면 고물로 번 돈보다 병원비가 몇 배는 더 나올 게 뻔했다. 자식들은 그를 말렸지만 청력이 약해진 할아버지에겐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동네 사거리엔 상점이 몰려있었다. 병원이나 은행에 가려면 사거리를 지나야 했다. 할아버지도 고물상에 가려면 사거리를 건너야 했다. 나의 생활 동선과 할아버지의 동선은 겹칠 수밖에 없었다. 치과 가는 길에 처음으로 길에서 할아버지를 보았다. 본인 신체보다 여덟 배나 큰 리어카를 길가에 세우고 빵집 옆에 놓인 종이 박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빵집 LED 간판 조명 아래서 할아버지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행인들은 할아버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도 그 행인 중 하나였다. 할아버지는 맞은편에서 누가 걸어오는지 관심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추운 겨울에는 군밤장수 모자를 쓰고 나갔고, 여름엔 반팔에 목장갑을 끼고 나갔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의외로 고물 줍기에 소질이 있었다. 그의 리어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리어카 양옆엔 비닐봉지나 플라스틱 통이 주렁주렁 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짐칸에 담긴 종이박스는 어찌나 가지런한지. 귀퉁이 하나 접힌 곳이 없고 달랑거리는 테이프도 없었다. 박스 크기도 제각각이라 높이 쌓으면 기울어질 법도 한데 할아버지가 쌓은 건 모서리를 기준 삼아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기에 누가 보기에도 할아버지의 리어카는 안정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가족을 포함한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신문지와 종이 상자, 버릴 책을 집구석에 모아두었다. 우리는 한숨을 쉬며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실었고, 한숨을 쉬며 할아버지 리어카 옆에 내려다 놓았다. 그럴 때마다 자식들은 말했다. 젊었을 때 좀 하지. 할아버지는 이 말이 안 들리는 듯했다.
할아버지에겐 리어카 전용 주차 공간도 있었다. 그가 사는 빌라의 1층의 구석진 곳으로 모닝 한 대는 들어갈 공간이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주차 공간을 리어카가 차지하는 바람에 가족들은 이웃들과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것이 없었다.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의 허리 또한 대쪽같았다는 점이다.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힌 건 자식들이었다.
어느 날은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길에 버려진 조그만 냉장고를 주워왔는데 알고 보니 이사하느라 잠깐 밖에 꺼내놓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졸지에 할아버지는 절도범이 되었으나 그날도 그의 허리는 대쪽 같았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자식들이 피해자에게 허리 굽혀 사과했다. 그날 밤 자식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리어카를 갖다 버리든가 해야지. 할아버지에겐 그 말이 안 들렸는지 다음날 또다시 고물을 주우러 나섰다.
할아버지는 어쩌다 리어카를 끌게 되었을까. 젊었을 적 그는 강원도 탄광에서 일했다. 자식을 낳고 서울로 상경해 동네 슈퍼마켓을 운영하기도 했다. 열 걸음이면 모든 물건을 다 볼 수 있는 작은 구멍가게였다. 자식들이 장성하고 손주들이 태어나고 같은 동네로 이사 왔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친구를 만들 줄도 몰랐고, 아내와 놀러 다니는 법도 몰랐고, 손자손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를 줄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였다. 할 줄 아는 일은 방에서 씨름 경기를 시청하거나 전국노래자랑을 보거나 잠에 드는 일뿐이었다. 무료한 여러 날을 보내다 리어카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유일한 취미이자 일거리가 생겼다. 할아버지는 몇 년을 내리 동네를 누비다 젊을 적 담배를 많이 피운 탓에 폐가 아파 작년까지 살았다.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가족 외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죽음이었다. 남긴 재산이 없었으므로 다툴 일도 없었다. 그가 낳은 자식들이 많았기에 서로 도우며 장례를 치렀다. 절차를 모두 끝낸 뒤 가족들은 그가 좋아하던 음식으로 빈자리를 채웠다. 그러고 보니 그 많은 음식 중에서 할아버지는 참 본인을 닮은 음식만 즐겨 먹었다. 명절에는 고구마전도 있고 동그랑땡도 있고 깻잎전, 육전 외에도 많은데 할아버지의 밥그릇 앞에는 꼭 배추전이 놓여 있곤 했다. 배추를 죽죽 찢어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다른 전과 달리 개운한 맛이 난다. 매일 곁들여 먹던 새우젓도 마찬가지다. 희고 짭조름한 새우를 밥 위에 얹어 먹으면 뒷맛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다. 어쩐지 할아버지의 리어카랑 닮은 구석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열심히 리어카를 끌었고, 폐지를 차곡차곡 정리했을까. 나는 그 마음을 영영 알지 못한 채 희고 개운한 음식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