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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심소현 Oct 05. 2021

아직 준비가 안된 연년생 엄마

아나운서 시절,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7시 전에 회사에 도착해 방송 준비를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증권 상황을 확인하며 매시간 생방송을 했다. 그렇게 장 마감 후 방송까지 마치고 다음 날 준비를 하다 보면 12시간이 훌쩍 넘게 일을 할 때가 많았다. 그때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해 봤으니 다음에 어떤 일을 해도 잘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건 자만이었다. 두 아이, 연년생 육아는 상상을 초월했다.


퇴근이 없었다. 회사는 야근을 할지언정 퇴근은 있다. 그런데 이건 매일 불침번을 선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들쭉 날쭉하니 늘 피곤하다. 아이의 울음에 반응하며 감정을 달래줘야 하고 안아 달라고 하면 바로 안아줘야 한다. 감정노동자, 육체노동자가 따로 없다. ‘애 보라고 했더니 동냥 자루를 다시 달라’고 했다는 옛 속담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두 아이 낳고 우울증이 심할 땐 엄마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직장인은 파업이라도 할 수 있지 엄마는 파업도 못한다. 엄마의 인권이 있나 싶었다. 그렇게 힘이 드니 불평불만이 내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짜증이 났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나에게 없는 것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나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두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있어 감사하다’가 아니라 ‘애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아이의 유년 시절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가 아니라 ‘나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 답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두 아이를 낳고 몸이 아프니 마음까지 약해졌다. 심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쉽사리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첫째도 엄마와만 있고 싶어 했고 둘째는 너무 어렸다. 일하는 분을 계속 고용하고 싶었지만 외벌이에 기존에 저금하던 것들이 있었기에 생활비를 더 쓰는 게 어려웠다. 친정에서 금전적 도움을 준다고 하셨지만 그것도 싫었다. 첫째와 둘째 출산 비용에 산후조리까지 도와주셨는데 또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는 게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심 남편이 저축 금액을 줄이고 도우미를 쓰자고 말해주기를 바랐는데 그런 말도 없으니 서운했다. 이런 상황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정신적으로 우울했다.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었지만 그럴 곳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저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다고 엄마가 되는 건 아니었다. 엄마가 되는 데는 준비가 필요하고 공부도 필요하다. 자동차 운전면허를 딸 때도 필기시험에 실기시험까지 본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부모가 되기 위한 책 한 권도 다 읽지 못하고 출산을 한다. 물론 임신 전부터 태교를 위해 애쓰고 출산 후에도 밤새워 책을 읽고 부모 되기 위한 훈련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아기를 위한 소품, 아기 침대, 출산 후 엄마를 위한 용품 등 그저 ‘용품 사기’에 급급했다. 정작 부모가 되기 위한 정신적 준비나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 대한 지식 등은 전무했다. 어느 집에나 한 권씩은 있을 법한 두꺼운 노란 책, 임신 출산 대백과를 읽은 것이 전부였다. 부모 역할을 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가 되는 길은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한 자리였다. 나는 아직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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