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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Nov 28. 2023

왓츠 인 마이 화장대; 보이지 않는 곳의 정리

짐정리 일지 D-37, 36, 35, 34

화장대

D-37


피카소는 인생의 온 힘을 오로지 그림 그리는 데만 썼단다. 집은 난장판이었고, 집안에 물건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발 디딜 수 없을 즈음, 유유히 이사를 떠났다고 한다. 학창 시절의 나는 피카소를 표방했던 것 같다. 잠자는 자리만 남겨둔 채 물건들을 온 바닥에 펼쳐놓고 지냈다. 남들은 몰라도 혼자만 아는 어떤 질서가 있었다. 누군가는 시험 때가 되면 정리를 해야 공부에 집중하고 책상이 깔끔해야 일이 잘 된다고 하던데, 나는 괘념치 않았다. 환경이 내면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시험 때일수록 더욱 방대한 자료들을 지면에 흩뿌려 놓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암기해야 할 내용이 저절로 머리에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실제로도 시험들을 제법 잘 봤다. 엄마도  대단한 방을 용인해 주었다.  


아이를 하나 키울 때도, 정리정돈이 내게 크게 의미 있는 활동이 아니었다. 아이와 즐겁게 놀고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집에서 매트를 깔고 모래놀이를 몇 시간씩 했는데, 바닥에 흩어지는 모래가 차츰 쌓여가도 괜찮았다. 아이와 마냥 즐거운 한 때에 집중했다. 불편하고 힘들었던 사람은 남편 한 사람이었다. 발바닥에 지걱지걱 모래가 밟히면, 우리 집이 사하라 사막이냐고 물었다. 어느 날은 아이가 바닥에 물을 흘렸는데, 거기서 실수로 미끄러졌다. 다행히 아프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물슬라이드 놀이터가 된 것이다. 더없이 신난 아이는 물을 두어 바가지 더 퍼다가 거실에 뿌렸다. 미끌미끌 데굴데굴 굴러다니면서 배꼽을 잡았다. 나는 어이없이 고개를 절레절레했어도, 아이의 웃음에 손을 들어주었다. 정말 자유롭게 아이가 놀게 두었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터 돌변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육아와 놀이 에너지를 애착 3년 신화에 다 써버린 모양이다. 아이가 둘이 된 지금은 저들의 즐거움보다는 관리자가 된 엄마의 '성가시지 않음'중요하다. 어지럽히지 않고 놀도록 격려하고 있다. 모래놀이는 몇 년 전에 버려 버렸다. 주변이 산만하면 도무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안 그래도 돌발 상황들이 많은데, 주변 환경이라도 내 뜻대로 정돈되어 있으면 마음 한 편에 안정감을 느낀다. 피카소처럼 다른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만 집중해 살았던 삶은 이제 환경을 돌보고 타인의 뒤치다꺼리를 책임지는 일상으로 변모했다. 더 이상 1인분의 My Way만 내세울 수가 없다.


며칠에 걸쳐 화장대 위와 아래를 정리했다. 보이는 것들이 질서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속에 카오스가 얼마나 꾹꾹 차 있는지를. 화장대 속을 손봐야 할 차례가 왔다.


사실, 8월 즈음에 미니멀라이프 모임에 참여하면서 화장대 속을 싹 드러냈다.  비포와 애프터가 확실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조언하셨다. 화장대 서랍의 넓은 공간은 작은 공간들로 나누어 구획을 정해줘야 단정함이 유지된다고. 게으른 나는 언젠가 얕은 정리함을 사서 넣어야지 마음으로만 생각하다가 3개월을 보냈다. 선생님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칸이 나누어지지 않은 넓은 서랍은 원상 복귀되었다.


화장대 속의 변천사를 기록했다.



비포 

애프터 1 : 깨끗이 정리한 모습

애프터 2 : 원상 복귀된 모습

무인양품 정리 도구

애프터 3 : 정리함을 이용해 구획을 나누어 정리한 모습

화장대 최종

D-36


애프터 3도 잘 정돈된 상태이지만, 애프터 1이 물건 자체가 많이 없어서 여백의 미가 있다.

나머지 선반을 최대한 비웠다.

또, 선물 받아서 혹은 신제품을 써보고 싶어서 네 개로 늘어난 썬크림 4개를 다 쓰기 전에는 절대로 새로 뜯지 말 것을 다짐했다.



빈 유리병 4개 안에 미술도구, 필기구, 칫솔 등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고장 난 볼펜들을 처분하고 유리병을 두 개로 추려 한쪽은 칫솔들을, 나머지는 필기구와 미술용품을 모았다. 연필통 두 개 없앤 것만으로도 너저분한 느낌이 줄어들었다.




D-35


정리는 확실히 장비발이다.

아들의 옷장에 마구잡이로 쌓여있던 장난감과 블록, 보드게임 등을 압축선반을 이용해 칸칸이 나누어줬다. 꺼내 쓰기 편리해졌다. 옷장칸 하나를 드디어 온전히, 완전히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D-34


눈에 보이지 않는 곳들에 집중하다 보니

보이는 공간들에 소홀했다.

영역에 균형 잡힌 에너지 분배를 해야 한다.

바닥면이 전체적으로 드러나야 로봇청소기를 쓸 수 있을 텐데. 로봇 청소기님을 모셔오기 위해, 그분의 길을 터 주는 준비 작업 중이다. 그러면 당당히 카드 긁을 때, 남편도 별 말 못 하겠지.



집의 겉모습과 안사정이 모두 가지런해지는 만큼

나의 외면과 내면이 조화롭게 깨어나 좋겠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짐정리를 하고 있다.



+ 위에 사용된 정리템은 살림 스승인 비채나쌤의 지도를 받았답니다. 각 상황과 집에 맞춤한 조언들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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