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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s libris Oct 28. 2020

나는 가끔
나를 혼내줄 누군가를 찾는다

잔소리가 필요할 때

어머니께 크게 대들고 나는 집을 뛰쳐나와 버렸다. 나는 어렸고, 방황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고, 나는 그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0대의 나에게 집은 그런 곳이었다.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억누르는 곳, 이해할 수 없는 말만 강요하는 곳, 그래서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 곳. 


집을 나와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최대한 집에서 멀리 도망가겠다고 다짐했다. 주머니에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전부였지만 나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호기로운 걸음은 지하철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걱정으로 변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형편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갈 곳 없는 중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가장 멀리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고, 나는 부모님의 요구가 부당하다고만 느껴졌다. 이것만은 몇 시간 전 집을 뛰쳐나올 때와 변함이 없었다. 나의 주장은 정당했고, 부모님의 말씀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힘껏 닫으며 아직도 시위 중이라는 의사를 온몸으로 시끄럽게 외쳤다. 나는 방에 물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어두운 방 안에서 억울한 감정을 삭이고 있었다. 30분쯤 씩씩대며 침대에 누워 있는데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어머니가 밥을 차려 놓았으니 밥 먹으라고 짧은 한마디를 남겨 놓고는 방을 나가셨다. 그때는 어머니의 ‘밥 먹어’라는 말이 어머니가 보내는 화해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통해 당신에게 격한 반감이 있는 사춘기 철부지 아들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항상 그런 식으로 나를 달래 주셨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나는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활할 수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독립을 했고, 그렇게 바라던 온전히 내 스스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금세 무엇이든 자의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움에 익숙해졌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수많은 선택들을 즐겼고, 제법 잘 꾸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휴학해야 했기에 이를 악물고 성적을 지켰다. 방학은 일을 하는데 모두 써 버렸고, 학기 중에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허덕였다.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다시 복학을 했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달라진 것은 나이밖에 없었다. 


나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하게 딱 꼬집어 무엇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리 찾아봐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알았다면 진작 바로잡았겠지만 나는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혹은 그 이상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면 나를 혼내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 어느 누구도 나를 혼내는 사람은 없었다. 밤늦도록 술을 마셔도,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수업을 빼먹어도 상관없었다. 모든 일은 내 선에서 해결했다. 


나는 혼쭐이 나면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았다.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혼쭐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교수님께 가서 꾸짖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따끔한 조언을 건네는 이는 없었다. 정신 차리라는 단 한마디도,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만약 내 옆에 부모님이 계신다면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셨을까?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이보다 삶이 나아졌을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나? 지금껏 들인 나의 노력은 유효한 것일까?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잘못을 저질러도 그 잘못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잘못을 안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어떤 말을 비수처럼 남기고 상대를 떠나버린다. 


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풀리지 않는 질문을 안고 나는 부모님을 찾았다. 오랜만에 들른 집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만 나이가 들어 있는 듯 보였다. 익숙한 솜씨로 내어온 어머니의 저녁밥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저 좀 혼내주세요.”라며 답답했던 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부모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는 혼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나의 잘못을 숨겼다. 부모님이 아니라도, 잘못됐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감추고 연기했다. 좋아하면 안 되는 상대를 짝사랑하면서 남몰래 가슴앓이를 했고, 과속 카메라 앞에서는 신호와 속도를 무척이나 잘 준수하는 것처럼 천천히 운전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연필 한 자루를 주머니에 숨기고 나오면서 심장이 터질 뻔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날 부모님께 가슴이 뻥 뚫리는 명백한 해답을 듣지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부모님의 대학 생활에 대해 들었고, 그 와중에 나와는 생각이 다른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었고, 나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털어놓았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아직도 잘은 모르지만 나는 그날의 감정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가끔 나를 혼내줄 누군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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