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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s libris Nov 12. 2020

가방 속 사생활

사람에 대한 예의

캠퍼스 안에는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절도도 있고 군기도 있다. 짧게 머리를 자르고 제복을 입고 줄 맞춰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그들은 ROTC 학사 장교다.


이제 막 대상 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 그들의 절도는 낯설게 비친다. 대학 2년을 군 생활을 하듯 학교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침마다 구호를 외치며 발맞춰 운동장을 뛰는 그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는 신비스러운(?) 면도 있다. 특히 그들이 항상 들고 다니는 일명 007가방은 만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 새내기는 학사 장교들이 항상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발걸음까지 맞춰가며 걸어 다니는 그들은 가방 안도 각이 져 있을 것만 같다며 농담을 했다. 가방 안의 비밀은 생각보다 빨리 밝혀졌다. 며칠 뒤 한 동기가 비밀을 알아냈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가방 안을 봤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 궁금해서 교양 강의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났잖아. ㅋㅋㅋ”

“그래서 봤어?”

“응, 근데 별거 없던데. 그냥 펜이랑, 공책, 거울, 빗 같은 게 들어 있더라고.”



전 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교양 강의에 학사 장교가 함께 수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를 수업에 조금 늦은 학사 장교가 자산의 앞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궁금증을 품고 있던 차에 마침 뒤에서 가방을 안을 훔쳐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는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방을 여는 순간 가방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100명도 넘는 학생이 모여 있는 강의실에서 벌떡 일어나 열린 가방 안을 들여다보았다고 말했다. 가방 안에 특별한 물건은 없었다. 자신과 똑같이 교재와 군인 냄새가 나는 노트, 펜, 거울이 있었다고 했다.





한동안 유행했던 what’s in my bag은 이제 그 리얼함은 거의 사라졌지만, 마치 가방 주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재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마치 특별한 비밀이라도 밝혀질 것처럼 손때 묻은 물건들이 하나둘 가방 밖으로 꺼내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가방의 상태에 따라 주인의 성격을 가늠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물건들이 가방 속 공간을 차지하겠지만 계절이나 시대, 사회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올여름에는 가방에 누구나 접는 우산 한 개쯤은 가지고 다녔음이 분명하다. 30년 전에는 가방에 손수건을 넣고 다녔다면 이제는 마스크 한두 장 정도는 항상 가지고 다닌다.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 가방에서 나온 물건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명함이다. 비즈니스맨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다닐 법한 흔하디 흔한 명함이 뭐가 특별했겠느냐 만은 어느 수업에서 만난 대학생이 가방에서 꺼내 내게 건넨 명함 한 장은 특유의 절실함이 묻어 있었다. 자신을 취준생이라고 소개한 그는 수업 참가자 중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교실에서 들려오는 거의 유일한 목소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교실에 막 도착한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게 주었다. 21세기 대학생들의 인사법은 분명 아니었다. '인스타그램도 아니고 명함이라니…’ 지나치게 구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건넨 명함 앞면에는 재학 중인 학교와 이름, 연락처가 잘 배열되어 있었다. 뒷면에는 깨알 같은 크기의 글자로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고 있었다. 자격증, 연수 이력, 대외 활동 사항, 수상 경력 등, 마치 작게 줄여 놓은 이력서 같았다.


그 명함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누군가는 서랍 속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네모난 종이가 그에게는 그토록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방법으로 자신을 알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작은 명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설명하고 싶었을까? 작은 평수의 종이 위에 그는 자신을 담으려 했던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명함은 너무 작았다. 누구에게나 존재의 의미를 그 위에서 찾기에 명함은 지나치게 좁다.




자, 지금 당신 가방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씩 꺼내놓고 명상에 잠겨보십시오.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시인 장정일이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했듯이 당신도 당신의 소지품들에 대하여 명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명상 속에 당신의 일상이, 당신의 삶이 보일 겁니다.


권석천 《사람에 대한 예의》




우리가 보내는 일상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변해 가방 안으로 들어온다. 재미를 담고, 아름다움을 채우고, 노력을 넣는다. 그 안에서 버릇을 꺼내고, 꿈을 찾고, 사랑을 꺼내어 본다. 마치 그 안에 또 다른 내가 들어있는 것처럼 뚱뚱해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탄다. 무척이나 사사로운 일상은 우리 어깨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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