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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Jan 03. 2023

[diary] 우울증 환자의 명상일지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얼마 전부터 명상하기 앱을 다운받아서 사용하고 있다. 1년 정기구독을 신청하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자주 이용하는 것은 15분 내외의 짧은 명상을 매일매일 조금씩 다른 내용으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아직 명상의 ㅁ밖에 모르는 명상 초보자지만 앱을 이용하다 보면 반복되는 내용은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고 현재에 머무르기'이다. 명상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호흡에 집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몸에 힘을 풀고, 눈을 감고 있노라면 온갖 잡다한 상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집중했다가, 딴생각을 했다가, 다시 집중했다가,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기를 수십 번 반복한다. 이래서 마음의 평화는 언제 얻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처음에는 별다른 효과를 느끼지 못하고 정기구독하는 돈만 아깝게 날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매일 아침시간에 명상을 하기로 계획도 세웠었는데 (당연하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우울증 환자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증상들 중 하나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후회와 집착, 이로 인한 우울감과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불안이다. 두 감정은 보통 사람들도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만 우울증 환자에게서는 그 빈도와 강도가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계속 떠오르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서 고통의 정도가 더 강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에게 명상을 권하는 이유는, 명상이 과거와 미래에 기인한 감정들로부터 벗어나, 내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상을 시작한다고 해서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봄날에 눈 녹듯 사라지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명상은 수많은 상념들을 눈을 감고 마주하면서, 이로부터 벗어나게끔 연습을 반복하는 훈련의 장에 가깝다.


 최근에 '매일 매일 좋은 날'이라는 책을 읽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동명의 한자어로 된 영화로도 만들어진 에세이의 내용은 일본식 다도(茶道)를 배우는 책쓴이의 이야기이다. 저자 모리시타 노리코는 20대 시절에 우연히 다도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규칙과 엄격한 순서들로 가득한 다도의 세계를 한걸음 한 걸음씩 배워 나가던 저자는, 다도를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나서야 어떠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수업을 듣던 어느 날, '지금 내리고 있는' 빗소리에 집중하게 된 것이었다.


253p. 빗소리 한 방울 한 방울까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집중해서 비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급격히 청각이 팽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무언가를 관통했다.
 나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긴장감도, 늘 마음속에 끌어안고 있는 직업에 대한 문제도, 오늘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도, 아무것도 없었다. 더욱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도,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무가치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불안도,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공포심도 전부 사라져 있었다.
 어마어마한 자유였다.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자유였다. 계속 여기에 있었고 어딘가에 갈 필요도 없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야만 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부족한 것도 무엇 하나 없다. 나는 그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도 모든 것을 온전히 충족시키고 있었다.
 짤막한 족자에 한자 두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비를 듣다聴雨.

"비가 오는 날엔 비를 들으렴. 몸도 마음도 제대로 여기에 있는 거야. 오감을 사용해서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맛보렴. 그러면 알게 될 거야. 자유로워지는 길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단다."
256p. 비 오늘날에는 비를 듣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질 듯한 추위를 맛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다도란 그럼 '삶의 방식'인 것이다. 안 좋은 날씨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비 오는 날을 이런 식으로 맛볼 수 있다면 어떤 날도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좋은 날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책의 이 구절을 읽고서야 내가 하고 있는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명상을 몇 번 한다고 해서 내가 가진 우울과 불안이 금세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치 운동을 통해 근육을 단련하듯이 명상을 반복하고 반복함으로써, 현재에 집중하는 순간을 조금씩 길게 가져가는 훈련을 하다 보면 조금씩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의 순간은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대신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울증은 다행히 건강한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만큼은 남겨 두었다. 명상은 우울증 극복을 위한 많은 노력들 중 하나이고, 앞으로도 꾸준히 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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