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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Aug 09. 2024

별 거 아니었네

#치앙마이 일년살기

자칭(?) 치앙마이 고인물인 나 자신.


오늘은 날씨가 하도 꿉꿉해서 빨래가 잘 마르지 않기에 세탁소에 가서 건조기에 세탁물을 말리고 시장에 가서 쏨땀 한 봉지를 사들고 오는 것으로 오전 일정을 마무리했다.


쏨땀에 밥을 뚝딱 해치우고 오후 일정은 글쓰기 좋은 카페에 가서 글을 쓰고 근처 사원에 들르는 것이었다.


카페는 치앙마이 시내에서 공항 쪽으로 빠지는 외곽 마을에 위치한지라 어지간한 관광객이 찾아가기는 어려운 곳이다. 나는 이 카페의 건물이 아기자기하고 예쁘며 붐비지 않는 곳이라 이곳을 좋아한다.


커피 맛도 꽤 좋은 편인데 '에스프레소'라고 된 메뉴에 설탕을 조금만 넣어달라고 주문을 넣었다. 한국에서 에스프레소라고 하면 작은 잔에 주는 커피 추출 원액을 말하는 것이지만 태국에서는 에스프레소 원액에 우유와 연유를 넣어서 진하게 마시는 믹스커피 같은 맛의 음료를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에스프레소 옌'이라고 부르는 데 여기서 '옌'은 차가운 음료를 의미한다. 아예 이걸 줄여서 메뉴판에 'ES Yen'이라고 표기한 카페도 많다.


ES Yen 맛없는 곳도 많다. 맛있는 데를 찾으려면 결국 여러 군데를 시도해 보는 수 밖에는 없다.


태국에 처음 와서 처음 마신 커피도 길거리에서 만드는 ES Yen이었다. 길거리 커피 노점 같은 곳에서는 직접 에스프레소를 내리지 않고 커피 가루를 이용해서 ES Yen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커피 가루를 넣은 버전은 끽해야 20바트 정도 할까 싶다.


건강을 생각하면 달달한 음료는 피해야 하지만 가끔은 이 ES Yen이 끌려서 '완 닛너이(조금만 달게 해주세요)'라는 요구사항을 추가하여 시켜 먹기도 한다. 커피를 잘하는 집은 설탕을 절반만 넣어도 꽤나 맛있게 음료를 제조해 준다.


반대로 아예 설탕 없이 시키고자 한다면 '노 슈가' 혹은 '마이 완'이라고 말하면 된다.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아이스라떼를 시키기 전에는 이 요구사항을 필수로 말하는 것이 낫다. 태국 분들은 설탕을 넣는 경우가 많아서 미리 말하지 않으면 음료에 기본적으로 설탕이 들어갈 수도 있다.


이렇게 시킨 ES Yen을 받아 들고 한동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 후, 근처의 '도이캄'이라는 사원으로 향했다. 이곳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꽤나 차가 쌩쌩 달리는 곳에서 차선 변경을 해야 하고 올라가는 길에 약간의 위험한 구간이 있어서 처음 갔을 때는 진땀을 빼기도 했던 도로다.


오늘은 차선변경도, 급경사 구간도 너무도 부드럽게 넘어가버려서 속으로 혼자 감탄을 했다.


처음에는 정말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면서 무서웠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봤는데 치앙마이에서의 오토바이 운전 말고도 참 많은 것들을 해냈구나 싶었다.


거의 대부분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하지?'라며 두려워서 소화도 제대로 못 시키곤 했다.


처음 인도여행을 했을 때, 처음 회사 면접을 봤을 때, 처음 성과평가를 받았을 때, 처음 전세 대출을 받고 계약을 맺었을 때, 처음 무에타이 스파링을 했을 때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심장이 쿵, 쿵, 쿵, 쿵 뛰었다.


가정환경이 '못 해도 괜찮아'였다면 조금은 더 나았을까?


나의 가정환경은 '이걸 못 하면 너는 나쁜 사람이야!'였는데 말이다.


심리적으로 나를 지탱해 줄 안전장치 같은 것은 전혀 없는 환경에서 항상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더군다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0에 가까운 사람이라 매번 '어차피 나는 못 해'라며 포기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의 천지가 파르르르 흔들리는 와중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서 그냥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는 없었다. 나는 높은 곳을 매우 싫어하는데 높은 산 위에 내걸린 구름다리를 벌벌 떨면서 걷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벌벌 떨면서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더니 나도 어쨌거나 이 삶이라는 것에서 고인물이 되는 순간이 오는구나 싶어서 참 다행이다 싶다.


모든 건 생각보다 별 게 아닐 수도 있다.


아직 내 인생에는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숙제들이 존재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다 별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별 거 아니다. 별 거 아니다.


치앙마이 토박이처럼 매우 부드럽게 오토바이를 주행하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별거 아닐 수 있다며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도이캄은 뷰를 보러 가는 곳이다. 세상 힙하게 누워있는 부처님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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