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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Aug 17. 2024

고작 이 유흥거리가 내 인생을 구했을지도 모르겠다

#치앙마이 일년살기

Loi Kroh Boxing Stadium


치앙마이 생활을 일주일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체육관 선수들의 시합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경기장이라고 하지만 술집에서 손님들을 위해 유흥거리로 제공하는 스페셜 이벤트 코너 같은 느낌이 있는 경기장이다. 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공간 한가운데 무에타이 경기장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길과 경기장 주변은 모조리 다 술집인데 분위기가 꼭 홍등가를 연상시킨다. 야시시한 옷을 입은 여성들이 주로 외국인 남성 손님들과 웃고 떠들고 때로는 담배나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다.


놀랍게도 여기가 경기장 입구다, 죄다 술집


티켓은 가장 저렴한 것이 600바트, 우리나라 돈 2만 4천 원 꼴이고 VIP 티켓이라고 천 바트 정도 하는 것이 따로 있어서 링 바로 앞 명당자리에 앉을 수 있기도 하다. 대부분 외국인인 손님들은 주변 술집에서 맥주나 음료를 사 마시면서 얼큰하게 취해서 경기를 관람한다.


이들을 위해 스페셜 매치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건장한 외국인 선수와 다 늙어서 은퇴를 바라보고 있는 태국인 선수를 붙여서 외국인 선수가 태국인 선수를 KO 시키는 그림을 매 시합마다 꼭 하나씩은 만들어내기도 한다. 경기를 조작한다기보다는 이렇게 미스매치를 붙여버리니 태국인 선수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80% 이상의 확률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번 경기는 영국에서 온 건장한 청년이었고 그는 주최 측의 바람대로 상대방을 KO 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순간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외국인 관객들이 다 같이 괴성을 질러댔다.


건장한 영국인 청년을 상대해주는 고인물 태국인 선수


때마침 영어를 잘하는 태국인이 옆에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내가 다니는 체육관 코치의 여자친구여서 이 상황이 무엇인지 매우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설명인즉, 이런 경기는 어차피 외국인 선수와 관람객들을 위해 맞춰진 것이고 상대방 태국인 선수도 이것을 알기에 적당히 맞아주고 돈을 벌어간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기거나 지거나 파이트머니에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아서 상대 태국인 선수도 전력으로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무에타이는 다 비즈니스야."


여성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10여 년 전의 무에타이는 돈보다는 명성과 명예를 위해 싸우는 측면이 컸는데 지금은 이렇게 관광객 대상의 장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놀라웠던 사실은 그나마 최근은 불경기라 10여 년 전보다 파이트머니가 훨씬 줄어들었다고 한다. 10여 년 전에는 5천바트 정도는 줬는데 오늘 경기는 끽해야 3천바트 정도 받을까 말까 한단다.


3천바트, 12만 원을 벌기 위해 선수들은 링에 올라서 KO를 당해 쓰러지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이벤트성 경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경기들에서는 다들 꽤나 진지하게 시합에 임한다는 것이다. 비록 술집 한가운데 위치한 경기장이지만 이 경기장의 챔피언십 매치도 있고 한창 젊은 나이의 태국인 선수 둘이 맞붙는 경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박진감이 넘친다.


내가 다니는 체육관 소속의 20대 초반 어린 선수 두 명도 시합에 참여하여 한 친구는 판정패했고 한 친구는 KO승을 거두었다.


이 친구들은 매일 성실히 시합 준비를 하지만 동시에 시합을 뛰기 2시간 전까지 체육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을 하다가 오기도 했다. 평소 일상생활을 하다가 바로 시합을 뛰는 것이다. 무에타이의 일상생활화라고 해야 할까.


그녀와 2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며 무에타이 업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에타이 코치는 경력에 관계없이 다들 할 수 있지만 무에타이 코치라는 직업에도 자격증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자격증이 있어야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자격증 취득에도 돈이 많이 들어서 자격증 없이 코치 생활을 하는 코치들도 많다고 한다. 그녀의 남자친구, 나의 코치도 그런 케이스에 속한단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자격증 여부와 관계없이 정말 훌륭한 코치다. 일하는 태도도 매우 성실하고 코칭 기술도 훌륭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함께 일하자고 요청하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그녀도 남자친구에게 영어나 중국어를 배워서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하라고 간곡히 말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라고 했다.


이유인즉 지금 그녀와 함께하는 치앙마이 생활에 너무 만족하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두바이에서 일을 하다가 치앙마이로 돌아왔고 그녀의 남자친구는 방콕에서 일하다가 치앙마이로 돌아와서 연인이 된 케이스다. 그녀는 두바이 생활이 만족스러웠고 앞으로도 더 많은 해외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가족에게 더 많은 것들을 경험시켜 주고 싶고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믿는다. 계속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 반면 그녀의 남자친구는 더 많은 기회고 뭐고 오늘 하루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래 지향적인 여자와 현재 지향적인 남자라니, 은근히 참 발란스가 잘 맞는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서 더 늙기 전에 뭔가를 이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그녀의 나이는 31살.


"31 years old? you're very young!!"


38세인 나는 그녀에게 너는 아직 어리고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라고 말하며 모두는 다 나이를 먹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태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은 것인지, 그녀의 친구들이 주위에서 다 나이로 호들갑을 떨고 주위사람들이 다 자신을 'pi(피, 한국어로 언니)'라고 부르니 자기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맞이할 상황일 테니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만 뭐 별 수가 있겠는가. 주위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다 꺼지라고 하고 나는 내가 몇 살이 되었건 간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는.


나이 듦을 미리 걱정하는 것도 웃긴 일인 게 내가 그 나이까지 살아있으리라는 절대적인 보장도 없지 않은가. 이 나이까지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이 나이까지 살아남았다. 나이가 드는 나는 슬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이까지 살아본 것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맞다.


태국 선수들 간의 경기는 박진감이 넘치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대화를 하며 링 위를 올려다보았다. 술 취한 사람들의 유흥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선수들이 보였다. 그래, 고작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고작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을 무에타이라는 것이 어쩌면 내 인생을 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흥거리를 위해 링에 오르기 위해 매일을 성실히 훈련하는 선수들과 나도 함께 성실히 운동했다. 아무리 우울함에 고통스러워도 일상인양 체육관에 나가 운동했다.


이런 나에게 함께 운동하는 코치나 선수, 다른 동료 수강생들은 마음을 열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어제인가는 태국인 수강생 한 명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마이 미 쏭, 마이 싸눅"

쏭(내 이름)이 없으면 즐겁지 않아.


그래, 무에타이가 술 취한 사람들의 유흥거리이건 아니건 뭔 상관이겠는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땀 흘리며 즐겁게 운동했다. 결과보다 과정이 즐거운 것은 내 인생 첫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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