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송당 Sep 10. 2024

치앙마이가 끝나고 난 후

#애프터 치앙마이

집은 꽤나 엉망인 상태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사는 곳은 단 한 번도 깨끗하게 정리된 적이 없었다.


아빠는 항상 엄마에게 집안이 더럽다고 온갖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어떤 것도 정리를 못 하는 사람이었다. 살림을 하는 엄마는 아빠보다는 조금은 나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리를 하는 사람은 역시나 아니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독립을 해서 나간 후에 몇 번이나 집안 정리를 시도해 보았으나 엄청난 관성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 마냥 모든 물건은 순식간에 자리를 잃고 집안은 어질러지기 일쑤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것은 그저 나의 성향 혹은 성격인 것인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에서 돌이켜보니 불안이 생활에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평소에도 정리를 엄청 잘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불안이 극에 달하게 되면 그 어떤 것도 정리를 할 기력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


치앙마이에서도 공황발작이 오고 우울증이 심했어서 집안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는데 거기는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 방 청소를 해주셔서 청소 전 날은 물건을 미리 정리를 해두는 편이었다. 청소 전 날 청소를 하는 것은 웃긴 일이지만 이 꼬라지를 남에게 보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한국으로 돌아와 잠시 친구집에 머물다 집을 구해 나왔는데,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그 물건들을 전혀 정리해두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와, 진짜 그럴 의욕 같은 것은 전혀 생기질 않는다.


회사에 있는 동안은 업무 적응을 위해 온 신경을 다 쓰고 퇴근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가 몰려와서 이 감정에 대응하느라 진이 빠진다.


고작 2주 전까지만 해도 치앙마이에서 유유자적하던 나는 순식간에 서울로 소환되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삶으로 돌아갔다.


2호선 출퇴근길은 고되다


서울에서는 치앙마이에서는 신경 쓰고 있지 않던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부모님을 만나지 않은 지는 어언 3년을 넘어서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무엇인가 이룬 것도 없는데 곧 나의 나이는 만으로도 마흔이 넘어가게 될 것이라서 그때부터는 마흔이 넘어간 미혼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도 싸워야 하는 시점이 온다. 뭐, 굳이 싸울 생각은 없지만 상당히 피곤할 것은 안 봐도 눈에 훤하다. 이미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는 호구조사를 당하는 중이다. 


지금의 이 불안은 여태껏 경험한 적이 없는 수준의, 대형 쓰나미 같은 불안이다.


'와, 정말 죽을 것 같아.'


아무것도 못하고 매트리스에 쓰러져 누워 있는 나날을 반복하다가 오늘은 겨우 일어나서 이렇게 글을 쓴다.


사실 이것은 좋은 신호다.


치앙마이에서도 우울함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다가도 글을 쓸 기력을 되찾으면 이것을 기점으로 조금씩 힘을 내서 다른 것들을 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집 상태는 개판이고 불안은 극에 달하고 있지만 동시에 '될 대로 돼라'라는 심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중이기도 하다.


금액을 딱히 아끼지 않으며 내가 사고 싶었던 것을 사고, 평소에 할까 말까 고민만 했던 라섹 수술 예약을 잡았다. 수술이 끝나고 몸이 회복되면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그동안 못해본 게 또 뭐가 있나 고민을 해볼 요량이다.


치앙마이에서의 일 년이 끝나고 난 후는 치앙마이에 가기 전 그리고 치앙마이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힘들다.


이 상황을 경험하는 것까지가 치앙마이 일 년 살기의 마무리가 아닐까 하여 애프터 치앙마이라는 매거진을 통해 계속 나의 상태를 추적해 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극도의 불안 상태에서 다시 술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매일 떡볶이를 먹는 수준으로만 대응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는 격려의 말을 보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