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

잔류의 미학 - 남아있는 것들

by 김여진


쌀밥


집이 없는 마음으로 자라 그대로 독립했고 대체로 혼자 살았다. 성인이 되어도 사람은 자라는 존재인 걸 혼자 살며 계속 배웠다. 그래서 삶에 대해 살아간다기보다도 자라난다 고 표현하길 즐기게 되었다. 마음은 특정 목표점에 도달하는 순간 멈춰버리는 기계장치가 아니기에 사유, 배움, 변동을 언제나 의연히 다루기로 다짐했었다.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 세 가지에 대한 각오는 놓치지 않고 지내니 어느 정도 살아는 있구나 생각한다. 가끔은 안도도.


다양한 거처를 가져보았다. 주거형태나 생김새 역시 아주 제각각이다. 돌처럼 반절은 땅에 묻힌 집도 있었다. 아예 지하로 내려가 오로지 인공 광원으로만 앞을 볼 수 있던 방도 기억한다. 땅에서 나와 하늘 높이 올라갔더니 글쎄, 옥탑방이 그렇게나 차갑고 뜨거운 공간임은 살아보기 전엔 상상도 못 했다. 날 별로 안 좋아하는 주인의 집에 더부살이할 땐 밤늦게 끝나는 알바를 구해 잠만 자러 들어갔다. 날 좋아하는 주인의 집에 머무르면서는 그를 위해 청소하고 요리하는 기꺼운 방식의 기쁨을 알았다. 매일 동침자가 바뀌는 여행지의 도미토리 한켠 1층 침대가 내 방이던 시절엔 언제나 항해하는 기분이었다. 작은 조각배와 같은 침실, 끊이지 않는 흔들림 속에서도 멀미 없이 잠잤다.


동남아시아의 바다 유목민 바자우 족 이야기를 본 적 있다. 바다 집시라고도 불리는 이 사람들은 가족 단위로 배 안에서 쭉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이 불편해 보이는 한편 왠지 쿨하다. 가진 적 없는 면에 대한 불편함은 안 적 없는 결핍이니 그들의 실제 만족도를 우린 모른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바자우 족의 삶이 가여움으로 보이는지 자유로움으로 읽히는지는 전적으로 내 몫이다. 바자우 족이 아닌 이들만의 숙제다.


어떠한 불편이라도 선택한 자의 삶의 일부로 기능할 땐 타인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가치다. 계속 이동하는 평수 작은 조각배에 실을 수 있는 물건이 많지 않아 어디에 살든 살림을 단출히 두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나 평생 안고 다니며 평생 한 번 들여다보지 않는 성질의 짐은 이미 모두 버렸다. 버리지 않으면 잃어버렸다. 크고 무거운 가전은 정말 없다. 그래서 친구들과 TV 프로그램에 대한 수다를 떨지 않고 지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은 혼자 살며 특별히 더 자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밥솥을 사는 대신 냄비 밥 짓기 좋은 작은 솥을 들였다. 밥을 포함해 많은 걸 끓일 수 있다. 하나의 이름으로 두서너 가지 기능을 포함하는 물건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그리고 어차피, 내 배는 아주 작으니 가전 실을 자린 애초에 없었다.


요샌 썩 괜찮은 집에 머문다.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온화한. 지척의 시장에서 채소 과일 호객 목소리가 늦은 오후까지 울린다. 웅얼대는 바순 소리와 닮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장의 풍경인 노인들은 날마다의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느리게 돌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꽈리고추 멸치볶음이나 돼지고기 김치찜 따위의 냄새가 풍긴다. 그것들은 앞 베란다로 들어와 뒷베란다로 퇴장한다. 이 동네의 모든 존재는 여유로이 걷는다. 반찬거리도, 고양이도, 밥상 냄새까지.


냄새로 밥때를 아는 집에 여전히 항해하는 기분으로 앉아 마음을 놓는다. 충분한 공간이지만 아직 전기밥솥을 들일 생각은 없다. 작은 배가 내 마음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이제 내가 가진 건 작고 열악한 거처가 아니라 쿨하고 강한 어부의 손이다. 단련된 훈련 방식이다. 항해사의 시선이다.


떠돌다가 항해사가 되었다 결국 항해 자체를 좋아하게 돼 버린 그는 흔들리는 물 위에서도 번듯한 밥솥 없이도 매일 새로 일어나는 우여곡절만큼이나 맵고 짜고 뜨거운 반찬과 끝내주게 어울릴 뽀얀 쌀밥을 너끈히 지어낸다. 맛이 각별할 것이다.




사라지는 세상에서 나는 자꾸 남아 있는 것들을 본다.

오래된 말씨, 식은 밥 냄새, 손끝에 남은 감정의 온도.

그것들이야말로 삶의 증거이자, 가장 오래 버티는 마음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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