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이후
멜번에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커리어를 갖기 위해 선택한 직업은 치과 간호사였다. 자격증을 따는 기간도 많이 길지 않은 1년 남짓이었고 일을 하면서 내가 상대할 사람들이 손님이 아닌 환자라는 게 좋았다. 이혼 후 감정을 소진하고 있는 나에게 손님을 상대하는 건 무엇보다 힘든 노동이 될 것 만 같았다. 나는 비교적 남에게 무관심한 편인 데다가, 고객으로 가게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소유라는 목적을 가졌기에 그들을 계속 상대하면서 일을 한다면 일 자체가 부담스러워질 것 같았다. 반면에 내가 만나는 대상이 환자라면 그래도 왠지 나는 최선을 다해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고 싶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치과를 좀 더 가깝게 느낀 건 내 외할아버지가 치과 의사의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나는 두세 살 때 몇 년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의 기억 속에 나는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따뜻한 돌봄과 보호를 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없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내 인생의 첫 번째 남자였고, 나는 할아버지를 참 좋아했다. 그가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고, 조용한 분이었다. 이후 엄마가 분가해서 따로 살게 됐을 때도 가끔 할아버지 집을 방문하면, 할아버지가 약수를 받으러 동네 앞산에 등산을 가실 때 종종 따라나서곤 했다. 산을 오르면서 할아버지에게 최근에 읽은 동화라든지, 상상해서 지어낸 나무 이름이라든지 아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할아버지가 내 이야기에 대꾸해 주신 기억은 없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할아버지가 꽤나 편했던 것 같다.
식사를 할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계란프라이를 따로 드리곤 했다. 할아버지는 그걸 언제나 한입에 다 털어넣으셨다. 어린 나에게 그 광경은 경이로웠다. 엄마도 나도 계란을 그런 방식으로 먹지 않았으니까. 가까이서 어른 남성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나는 그 새로운 호탕함에 마음을 빼앗겼고,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광경을 보고 싶었다.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지만 늘 편안했다, 할아버지 옆에서.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다. 나중에 이모들과 엄마에게 전해 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적잖이 놀라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사실 의사면허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청년 때,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때, 너무 가난해서 일을 찾기 위해 밀항을 해서 일본으로 가셨다고 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 결국은 치과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병원의 궂은일을 하며 치과 기술을 보고, 배우고, 돕고 하면서 기술을 손에 익혔다고 했다. 해방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허름한 집을 사고 치과의자를 사고 환자를 받기 시작했고, 일반 병원비보다 싸고 솜씨 있는 할아버지의 집으로 환자들은 많이 몰려왔다고 했다. 엄마는 그 시절, 집은 항상 낯선 사람들로 붐볐고 그래서 들어가기 싫은 정도였다고 했다. 동네에 할아버지집이 치과라는 걸 모르는 집이 없었기에 경찰들이 빈번히 찾아와 눈을 감아주는 대신 늘 돈을 요구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쩔쩔매며 그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이제 금방 마무리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시절 50,60년대의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다정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이모 삼촌들 그리고 엄마는 대견하게도 그 시간을 고스란히 살아내셨다.
멜번에서 trainee, 그러니까 수련 치과 간호사 일을 구하고, 일을 하면서 나는 매일매일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나도 그처럼 외국어를 쓰고 다른 문화 속에서 나를 숨기고 있었다. 아무런 사전 배경 지식 없이 치과에서 구강 관련 치료 과정을 알아갈 때마다 할아버지도 이렇게 생경하게 배워나가셨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 타국에서, 그리고 더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하나하나 더 절절하게 공부하셨을 젊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서인지 어쩔 땐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뜬금없이 할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엄마는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일을 하실 적에 먹을 게 없어서 토마토만 드신 적이 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 기억 때문에 토마토를 입에도 대시지 않았다는 이야기, 뜨개질을 빨리빨리 그리고 너무 잘하셨다는 이야기 등 전에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래도 언젠가는 이일에 익숙해질 날이 있을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지금은 치과에서 일한 지 훌쩍 1년이 지났고, 바람대로 손이 꽤 빨라지고 일이 익숙해졌다.
같이 일하는 치과 선생님들의 치아를 때우는 기술, 크라운을 씌우기 위해 치아를 다듬는 과정을 보면, 치과 일이 꽤나 심미성과 연관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미세하게 서로 다른 치아의 색을 구분하고 레진과 크라운의 색을 결정하고, 전체 구강구조를 이해하고 이의 맞물림에 맞게 크라운을 씌어 대체하는 과정은 사실 크기만 작다 뿐이지 조각과 비슷하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던 나를 생각해 보면 조금은 할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걸듯, 조용한 시간에 내 앞에 있는 할아버지를 상상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6학년때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는 상상을 했다. 할아버지, 저 이혼했어요. 그리고 호주에서 혼자 잘 살려고 할아버지처럼 치과 간호사 일을 시작했어요.
할아버지는.. 꾹 다문 입을 하고 조금은 흐리지만 따뜻한 눈으로 나를 보며 그냥 그의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아주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