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퇴근길에 문화의 날을 결심하고 간만에 gv를 보고 왔다. 작품은 <9명의 번역가>! 제목이 제목이니 만큼 황석희 번역가님이 참석하시고 민용준 기자님이 진행하셨다.(번역가님은 실제 이 작품의 번역을 맡으셨다.)
'9명의 번역가'는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스릴러 시리즈 <디덜리스>의 마지막 3권 번역 출간을 앞두고, 내용 보안을 위하여 각국 번역가를 한 별장에 모아두고 번역 작업을 시키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분명 물 샐 틈 없이 단속한 줄 알았는데 인터넷을 통해 소설의 일부 분량이 유출되고, 범인이 남은 내용의 추가 공개를 예고하면서 출판사 편집장 에릭은 분노에 휩싸인다. 그는 9명의 번역가 중 범인이 있다고 확신하고 범인 색출 작업을 시작한다.
우선 영화 자체는 그럭저럭. 지루하진 않았다. 나름대로 반전도 있고. 영화보단 gv가 훨씬 재밌었지만 말이다.
작품적으론, 일단 설정 자체의 흥미로움이 크다. 유명작가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 출간을 앞두고 실제로 번역가들을 한 공간에 모아두고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는데 여기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한다. 수능출제위원들 호텔에서 숙박시키며 보안유지한다던 썰과 비슷한 설정 같기도. (한국에서 만약에라도 리메이크 한다면 수능 출제위원 설정 괜찮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매우 견고한 선악 구도를 가진 작품이다. 예술과 인간성의 수호자와 자본주의에 매몰된 업계의 대립이랄 수 있겠다. 여러가지 상징들이 등장하고 그런 코드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다만 가장 큰 아쉬움은 캐릭터의 도구적 사용 측면. 영화 자체의 메시지와 배치된다는 지점에서 더욱 납득하기 힘들어 진다. 심지어 제목이 '9명의 번역가'인데 9명 번역가 각각의 캐릭터가 제대로 자신을 어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사실 전체 극에서 두 명의 캐릭터를 제외하면 다른 인물들은 거의 지워진 것과 마찬가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번역가들을 마치 가축처럼 대우하는 것에 분노했다는 범인이, 스스로가 짠 계략에서 역시 번역가들을 소모적으로 이용할 뿐이라는 게 지나치게 모순적이다.
gv에서 황석희 번역가님은 특히 헬렌 캐릭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번역가에 대한 좋지 않은 스테레오 타입이 반영된 것 같아서라고. (가장 좋았던 건 그리스 번역가!)
사실 영화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으니 gv 얘기만 좀 더 하자면, 황석희 번역가님이 직접 제시하신 언어별 자막색을 바꾸는 아이디어는 이 영화에 정말 적합했다고 생각한다. 자막 제작업체에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을텐데 그 아이디어를 채택해주신 것도 멋있었고. 자막은 결국 작품 자체에 기여하는 것이 그 존재 목적이고, 그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좋은 사례가 생긴 것이 반가웠다.
추가로 황작가님은 다른 무엇보다 '하루 20장 번역'이라는 과제가 너무 가혹해서 그 설정 자체에 기함하셨다고. 실제로는 하루 10-15장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라고 한다. 별 생각없이 그러려니 봤었는데 번역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진짜 비인간적인 환경이었구나-가 조금 더 와닿았다.
그날 gv엔 번역가 지망생 분들이 꽤 많이 참석하셨다는데, 그래서 번역가님도 번역과 관련된 업계 이슈나 번역가에 대한 처우 등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이 부분이 내게는 영화보다 훨씬 유익했음!
여담으로, gv 참석자들에게 배급사에서 키트를 선물해주셨는데 출입증 카드가 특히 센스있다고 느꼈다. 영화가 좀 더 마음에 들었다면 회사 사원증 대신 들고 다니고 싶었을 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