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없는 날 가는 길
유모차와 휠체어의 산책
우리의 신혼집은 지어진 지 15년이 된 아파트였다. 낡은 걸 들어내고 마음을 온통 쏟아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집 앞에는 골라서 갈 수 있는 카페가 여럿 있고 지하철역과 대형 마트와 도서관도 가까웠다. 너무 살기 좋은 동네였다. 그러다가 봄이 태어났다.
유모차를 끌고 외출한 첫날은 그 집에 산지 3년이 지난 후였다. 매일 드나들었으니 이제 눈 감고도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유모차와 함께 나서니 낯설었다. 현관 앞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가는 경사로는 지상 주차장과 접해 있었다. 늘 주차된 차로 막혀있다는 뜻이다. 옆으로 돌아 나가는 길에는 경사로 없이, 인도와 차도 사이에 놓인 턱에 주의해야 했다. 힘을 줘서 유모차 앞바퀴를 들지 않고 별생각 없이 나가다가는, 덜컹하며 막혔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다. 그 턱을 없애야 한다고, 불편하고 위험하다고 했다. 일주일 만에 아저씨 두 분이 오셔서 콘크리트를 깎아 없애주셨다. 지난 18년 동안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살던 104동은 해당 단지의 유일한 20평대로 옆 집 아랫집 윗집 할 것 없이 다 신혼부부나 어린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봄과 같은 시기에 태어난 아이부터 초등학생까지 다양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까?
경사로 문제가 너무나 간단히 해결되자 나는 들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라고 감탄했다. 그 뒤로는 문제를 알고 말하는 게 어째서 필요한지에 대해 떠들곤 했다. 비슷한 문제를 발견하면 지체 없이 민원을 넣었다. 나누고 싶은 미담은 더 이상은 없다. 그 뒤로 그 어떤 비슷한 문제도 그런 속도로 해결되지 않았다.
얼마 전 기사 하나를 읽었다. 경사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 아파트 사례가 나왔다. 기사의 첫 줄은 잊히지 않는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공계진 씨는 10개월째 싸우고 있다. 10개월째, 싸우고 있더니. 어째서 싸워야 얻을 수 있을까. 아니, 왜 싸워도 얻을 수 없을까.
아파트 측의 논리들은 여기저기서 들어본 것들이었다. 이런 것까지 해줘야 하냐, 이런 게 당연한 것처럼 말하지 마라, 는 식이었다. 시청의 권고 정도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늘 비용이 그들의 방패가 되어 줬다. 혜택을 누리는 이는 적고 비용은 너무 많이 든다고 말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내 아파트 안의 경사로 하나는 해결했지만 동네는 온통 덜컹대고 있었다. 생활불편신고 어플과 구청장님께 바랍니다 따위에 글을 썼다. 도서관 앞 경사로에 불법 주차된 자동차를 신고하고 깨진 블록을 신고하고 계단 이용만이 가능하다며 시설 관리 편의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잠근 곳을 신고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마지막 신고 건은 인도 한가운데 버젓이 주차된 영등포구청 관용차량이었다.
나는 피하기로 했다. 굳이 복잡한 도심에서 덜컹대며 사느니, 한적한 외곽 도시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사 온 곳은 새로 정비된 곳이라 깨끗하고 좋았다. 다양한 산책로를 구비한 공원이 주변에 많고 넓었다.
하지만 갈 수 없는 길도 여전히 많다. 조경을 위해 가짜 자연을 만드느라 산책로 바닥을 에 바위와 흙을 교대로 채웠다. 어떤 길은 멀쩡하게 잘 이어지다 두 칸짜리 계단에 막혔다. 봄은 그런 산책로를 유모차를 가져가지 않아도 되는, "동생 없는 날에 가는 길"이라고 부른다. 둘째가 걷기 전까지, 봄은 좋아하는 길을 걷기 위해 동생이 없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
아파트 값은 오르고 경사로는 없다. 부동산 정책이 빠르게 강화되고 바뀌는 동안 차별금지법은 기약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