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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Jan 11. 2021

바다, 아름, 사랑

있잖아 난 너를 아직도 사랑해*



인생은 선택이라고 하는데 나는 진짜 선택같은 걸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눈이 띄게 느린 걸음이라 늘 쫓아가느라 바빴잖아. 혹은 쫓기듯 살았지. 그냥 상황을 몰아간 뒤 선택권이 없어질 때까지 몰아간 뒤, 별 수 없이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지냈어. 크게 나쁜 일도 없고 나 자신을 원망할 일도 없어. 안전하고 나른하지.


혹시 그 옛날 유행했던 백문백답 해봤어? 아니면 심리테스트 같은 것들. 난 그런 식의 질문들을 좋아했어. 어떤 영향력도 없는 답들을 선택할 수 있잖아. 그건 싱겁지 않아. 오히려 솔깃한 조건이지. 혼자 앉아 아주 신중하게 답을 쓰거나 택했어.


그러다가 꽤 까다로운 질문을 만나기도 해. 사랑과 우정에 관련된 건 언제나 어렵지. 너무 오래 생각했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들이 거기에 있어. 이상형에 관한 것도 그 중 하나야. 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오래 고민했어. 나만의 유일한 답을 찾아내고 싶었지. 여러 번 썼다 지운 후 나의 이상형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사주는 사람이라고 정했어.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아름다운 글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좋겠다. 아름다운 작품을 사랑하고 문학에 돈을 지불하는 일에 지체없는 사람을 사랑해야지.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나니까 도저히 민음사 전집에 속하는 책은 살 수가 없더라고. 나는 그걸 도서관에서 가끔씩만 빌려 읽었어. 웃기지만 진짜 그랬어. 그게 일종의 미신이 되어버린거야. 저걸 다 사면 나는 완벽한 사랑의 순간을 하나 잃는거다.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그런 건 사주지 않았어. 단 한권도 사주지 않았지. 물론 나도 그 이상형에 관해선 금방 잊어버렸어. 여전히 선택권이 없어질 때까지 상황을 몰아가며 사느라 바빴거든. 그게 안전하지도 않고 나른할 수도 없다는 걸 차츰 배우면서. 그러다가 너와 자주 싸웠지. 사실 우린 정말 많이 달라서, 조금만 자신에게 지쳐있거나 혹은 마음을 고쳐 먹으면 거하게 싸울 수 있잖아. 우린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부터 너무나 달라. 산책을 좋아하는 나에 비해 너는 어차피 돌아올 길을 걷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어. 너는 아이돌이나 힙합씬의 음악을 분석하고 나는 음악이 될 수 없는 소음의 음악성에 대해 떠들잖아. 너는 장을 보거나 옷을 사는 걸 잘하고 나는 쇼핑을 귀찮아하지. 그런 우리가 만나 서로 다른 유형의 개그를 뽐내며 웃고 떠드는 걸 보면 신기할 뿐이야. 그래서 싸움도 길게 끌지 못하지. 이상하게 웃기니까.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결코 사과하는 법을 모르는 나에게 너는 뭐가 문제인지 얘기해보자고 하니까.


아이들과 사랑의 공통점은 싸우면서 커지는 거라는 말, 우리에게 통했잖아. 싸우면서 알게 된 것들이 우리를 지켜주었어. 사소한 일들로 스트레스 받고 예민해진 나를, 너는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냉소로 위로했어. 서로에게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본다며 질색하던 날에는 내가 얼마나 비슷한 사람들의 커뮤니티에서 공감 능력을 뽐내고 있었는지 생각할 수 있었지. 너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조금 커졌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인간들이라며 습관처럼 비난하는 게 오만이라는 걸 배웠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생기는 좋은 점이랄까?


그런데 그 날은 우리가 이제 거의 닮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겨우 시간을 내 멀리 떠난 여행에서 말이야. 산책에 취미가 없는 네가 굳이 밤바다에 나가보자고 했잖아. 주섬주섬, 맥주랑 아까 먹고 남아서 포장한 닭튀김까지 챙기면서. 비가 오거나 얼어붙게 추운 날의 산책을 좋아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너와 함께, 나는 검은 바다와 모래사장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는 바닷가를 걷고 있었어. 끈적한 여름 공기마저 좋았지. 너는 너의 태명이 바다였다고 얘기해주었어. 나는 어렸을 때 사람들이 아름아, 하고 불렀다고 말했지. 우리 둘이 같이 있으면 아름다운 바다 같은 건가. 속으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어. 너는 바다와 이름이 뒤섞인 가운데 자랐겠구나. 아직도 나를 아름이라고 부르는 엄마의 친구들이 있는 것처럼. 너와 나의 어린시절을 상상하며 걷다가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셨지. 그때 네가 말했어. 나를 위해 넓은 바다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너는 닭튀김의 기름이 아직 남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목걸이를 나의 목에 걸어주었어. 물론 나는 수영을 못해서 바다보다 들판을 더 좋아하고, 무엇보다 물고기들이 눈을 뜨고 죽은 모습이 싫어 생선도 먹지 않았다고, 죽은 얼굴을 먼저 봐버린 탓에 헤엄치는 물고기를 두려워하고, 바다는 넓은 만큼 이제 쓰레기로 가득하기도 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 대신 우리는 그 날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어.


그 약속은 어떤 선택이었을까? 이번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불가피한 선택을 한 건 아니었을까? 시간이 한참 흘렸는데도 가끔 생각해. 어쩌다 우리가 만났냐? 멀뚱하게 마주보고 앉았다가 이렇게 묻기도 했잖아. 게다가 너는 아직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지 않았어. 문학동네 세계문학시리즈의 최신작만 몇 권 사줬을 뿐이지. 그런데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네가 만들어 준 뜨거운 파스타를 먹었어. 생크림도 치즈도 없어서, 냉장고에 있던 마늘과 우유와 밀가루로 맛을 냈다는 너의 파스타는 고소한 치즈와 부드러운 크림의 맛이 났지. 라면도 잘 못 끓이는 나는 이번에도 신기했고 배가 불렀어. 하지만 역시나 싱거웠어. 우리가 함께 먹는 건 모두 싱거워. 나는 소금을 더 칠까 묻고, 너는 늘 내게 짜게 먹지 말라고 하는데, ㅡ 있잖아 난 너를  아직도 사랑해 ㅡ 선우정아의 신곡이 흘러나왔어. 맞아. 나도 그렇구나.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르고 자주 서로를 오해하지만, 결코 후회할 리 없지.


오래오래 상상했는데, 그 문학 전집이 높게 쌓여 있고 그 옆에 서 있는 사람과 고백 같은 거 말이야. 그런데 이제는 그게 없어도 좋은 거야. 영영 도서관에서 낡아 빠진 책을 빌려 읽어도, 각자가 주문한 책들이 눈에 띄게 달라도, 싱거운 요리만 먹어도 괜찮은 거야.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선택이야.   

















*선우정아 <동거> 가사 중 “있잖아 난 너를 아직도 사랑해"

**사진은 <동거> 뮤직비디오 스틸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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