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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Aug 08. 2022

고장 난 배관

다큐멘터리, 2022, 제시 샤를로와 베아트리스 요른의 대화

<고장 난 배관> (다큐멘터리, 2022, 제시 샤를로와 베아트리스 요른의 대화)


컵은 깨지지 않았는데, 검은 액체가 흘러 테이블 위를 조금 적셨다. 그 액체는 점도가 없다. 검지만 투명하고 아마도 뜨겁다. 옅은 김이 오른다. 머그를 들고 있던 여자는 어두운 실내를 밝히려고 낮은 장식장 위에 놓인 중국식 조명을 켠다. 붉은기가 도는 빛이 서늘하다. 코로 한숨을 내쉬며 선 채로 말했다. 


“우리 마을에는 오래된 신화가 있어요. 소는 신성한 것이기에 결코 우유를 마시지 않아요. 물론 그저 산속에 사는 소수민족의 믿음일 뿐이지만, 제게는 당신이 믿는 종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울 때 그게 재미있었어요. 모유라는 단어를 보세요. 어머니를 뜻하는 모와 젖을 뜻하는 유가 합해진 것이라고 외웠죠. 우유라는 단어는 소의 젖이고요. 소에게는 어머니가 없나요? 마치 그렇게 말하려고 만든 단어 같지요. 그러나 그건 그저 모유입니다.”


나는 인터뷰를 제안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 이 기획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던가. 


“우리가 함께 수업 들었던 때가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겨울이 끝나갑니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이 여자들을 ‘걸어 다니는 고장 난 배관’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잖아요, 그 수업에서. 당신이 최근 몇 년간 배관을 가지고 만드는 설치 작품이 가지는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는 서울의 한 미술관의 운영하는 강의 시리즈에서 만났다. 외국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와 나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눈빛이 드러나지 않는 긴 앞머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입가의 주름은 웃음 기호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제시 샤를로이며 설치와 조각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로 배관이나 통신 케이블을 재료로 삼는다고도 덧붙였다. 간단하고 준비된 말이었지만, 띄어쓰기가 이상한 한국말로 애써 말하는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졌다. 쉬는 시간에 나는 그에게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가 “네, 반갑습니다.”라고 답했다. 


“맞아요. 당시에 그 강의의 제목이 <여성과 몸>이었죠. 다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 참석했는데도 엄청났어요. 무엇보다 제니퍼 건터의 책을 인용해주신 그 부분이 제게는 참 재밌게 느껴졌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저의 몸이 고장 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공부를 하거나 대화를 할 때 통제할 수 있던 것들이 월경 때 불가능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까지도 새로운 언어를 배워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고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는 이미 10대 때부터 읽고 쓸 수 있었고요. 지금은 한국어를 배우고 말하고 있지요. 제가 원하는 것을 조절하고 계획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매달 월경을 겪으며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죠. 약이나 운동, 명상으로 월경이 제멋대로 바꾸는 저의 상태를 통제해보려고도 했습니다. 성공했을까요? 실패, 실패, 실패. 이건 프로메테우스적인 실패담이 아니에요. 

그냥 실패 그 자체죠. 


저는 통제가 실패한다는 점에서 고향을 자주 떠올렸어요. 그곳 사람들은 흐름을 읽으려고 하지만 그것을 바꾸거나 멈추게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도시에 살면 잊게 되는 점입니다. 여자들은 매달 그것을 몸으로 겪어냅니다. 통제할 수 없음. 그것을 통해 저는 삶과 세계를 이해했어요. 


그런데, 여자들은 수분을 너무 많이 섭취한 탓에 한 달에 한 번씩 자궁으로부터 액체를 배출한다며, 고대 그리스 의사들이 여성을 두고 ‘걸어 다니는 고장 난 배관’이라고 생각했으리라는 부분이 언급되었었죠. 그건 월경을 두고 나온 말이었고, 저는 그 표현이 무척 우습더군요. 저는 제가 고장 났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그게 오해란 걸 알아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고장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떠올렸어요. 월경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유 과정도 포함됩니다. 아이가 원할 때 젖을 물리면 젖이 나오는 줄 알잖아요. 아름다운 엄마가 젖을 물리는 그림을 떠올리죠. 거기에는 포근함, 사랑, 풍요가 있고요. 젖과 꿀이 흐른다는 표현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요. 가슴은 핏줄이 드러나도록 고통스럽게 팽창하고 젖은 제멋대로 질질 흘러나와 옷을 적셔요. 고장 난 배관처럼요. 


저는 월경 때 흐르는 피는 미워했어요. 하지만 젖은 그럴 수 없더군요. 어떤 사람은 나를 아기의 밥통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기가 먹을 것을 원망하고 미워한다면, 그녀는 마녀 취급을 받을 거예요. 저는 기꺼이 마녀가 되었지만, 그건 당신이든 나든 선택한 것뿐입니다.


젖이 나오든 나오지 않든 그건 고장과 상관이 없어요”


우리들의 대화 사이에는 기록을 맡고 있던 한국인 서민주가 있었다. 그에게는 꽤 늦게 결혼해 낳은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당시에 28개월인 아이로 5개월 정도 모유수유를 했다고 한다. 직접 아이가 젖을 빨아먹는 것을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어려웠다. 책, 의사, 친구, 부모가 각기 다른 형태로 아이의 성장 방법을 가르치는데, 그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먹는 젖의 양이었다. 개월 수마다 아이가 먹어야 하는 젖의 양이 있었다. 너무 많아도 안되고 적어도 안 되는 것을 맞추기 위해서는 젖병이 필요했다. 그냥 젖을 물고 애쓰는 아이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늘 의심에 사로잡히기 일쑤였다. 그건 정확하지 않았고, 정확하지 않은 것은 현대 사회에서 좋은 육아가 아니었다. 아이가 울면 생각했다. 젖이 모자랐나? 알 수 없다. 오전에 먹은 커피 때문에 카페인이라도 섭취하게 된 걸까? 한 잔은 괜찮다고 했는데?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모든 것을 알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고통이었다.


이제 40대 중반에 들어선 민주는 제시가 주부로 지내다가 40대 후반에 작가로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미술계에서 유명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작업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지점을 갖고 있었다. 누구도 그것이 지금 50대를 보내고 있는 소수민족 여성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갈피를 잃은 느낌이라고 말하곤 하는 민주에게는 어떤 레퍼런스가 필요했다. 나이가 들어서 제 몫을 잃지 않는 여자의 목록 같은 것.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남편이 배관공이었지요. 그에게서 배관의 생리에 대해 배웠고, 그의 일을 보조하면서 배관을 다루는 법을 배웠어요. 우리가 자란 마을에는 일이 적었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로 떠나야 했고, 배관과 타지라는 두 가지가 저를 만들게 도왔습니다. 


교체 후에 폐기해야 하는, 틀어지거나 구멍이 난 배관을 깨끗하게 씻어서 연결해 만든 설치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만든 것이요. 그걸 본 남편은 비웃었어요. 그는 선한 사람이고 그저 농담 같은 걸 던지며 웃었던 거 같아요. 기분 나쁜 웃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죠. 그때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러 나갔어요.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하는 수업을 들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제가 만든 것을 보여주었고 제가 지금 무엇을 만드는지 말했어요. 자기소개, 설명, 사진, 해설 등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음.. 운이 따르긴 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네요. 

운이 좋았다는 말을 취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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