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가난과 질병, 사고쯤은 모두 가뿐히 이겨낼 수 있다고 장담하던 때였다. 당연히 '사랑'의 힘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용기를 내게 주었고 지치지 않을 순간들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 생각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에게 밥을 떠먹여 줄 것이고, 너를 씻겨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단하지 않을 거야. 너의 얼굴만 보면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어떤 드라마 혹은 다큐의 주인공이 되곤 했지만 실제 그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다, 샤워를 하다 문득 만약에 내일 출근길에 우연히 옛 기억 속의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수백 번 수천번 했던 상상들이 정말 우연처럼 현실 앞에서 펼쳐졌을 땐 그리 화가 나지도, 당당하지도 않았다.
허리를 더 꼿꼿이 세우고 걸을걸... 혼잣말로 대뇌였다.
우연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난다.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이름 모를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망설임 없이 스쳐 지나간다.
'남'이 된다는 건 모든 다짐과 역사를 무마시킬 만큼 무심한 말, 무서운 말이다. 안부조차 궁금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