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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7. 2024

마녀사냥의 ‘리버럴’ 통과의례 혹은 사랑

<졸업>


          

소설로 치면 성장소설인데, 압축적으로 대학 졸업 즈음이란 청춘의 한 시기를 포착하여 인생의 변태(變態)를 그려낸다. 영화 <졸업>을 텍스트 중심으로 파악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화면 중심으로 바라보면 후반부에 집중되긴 하지만 로드무비이다. 1967년에 개봉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은, 대부분의 영화 평론가나 애호가가 주저 없이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꼽는 영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작품 내용이 문제가 돼 수입이 보류되다가 4년이 지나 1971년에 일부 장면을 삭제하여 개봉하였다. 당시 선정성을 문제 삼았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1971년, 1988년, 2020년, 국내에서 세 번 개봉했다. 2020년 국내에서 상영된 <졸업>은 <졸업> 제작 50주년 기념으로 2016년에 4K 디지털로 복원한 판이며, 무삭제본이다.      


성장통?     


영화는 주인공 벤자민 브래드독(더스틴 호프만)이 미국 동부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서부 캘리포니아 부모의 집으로 귀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카메라는 캘리포니아 어느 공항의 무빙워크에 올라타 이동하는 벤자민을 제법 오랫동안 보여준다. 수줍고 불안한 표정이다. 휑한 벽면을 배경으로 무빙워크에 실려가는 벤자민의 모습은 그의 무력과 표류를 상징한다. 성인의 문턱에 도달했지만,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중산층 의식과 규범에 맞춰 양육된 엄친아가 현재 직면한 좌표 상실을 보여준다. 무빙워크는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자동차 이동 장면과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자동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달려가는 벤자민의 모습에선, 시작 장면의 무빙워크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무력과 표류가 엿보이지 않는다. 열정과 단호함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무빙워크에 실려 가는 수동성은 목적지를 찾아 자동차를 몰고 가는 적극성과 대비된다. 또한 <졸업>의 유명한 엔딩은, 수동성을 탈출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분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것을 성장소설 결말의 흥미로운 영화적 변용이라고 불러 무방하겠다.


부모의 여망에 부합한 삶을 산 벤자민의 엄친아적 수동성, 그리고 졸업과 함께 찾아온 좌표상실의 은유는 물이다. 어항과 수영장을 채운 물은, 영화 초반부 벤자민의 대사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한다. 벤자민은 어항을 배경으로 어둡고 힘겹게 호흡한다. 물속에 잠겨 있거나 물 위에서 부유하는 장면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젊은이의 초상이다. 


물은 주인공의 성적 탐닉(耽溺)의 은유이기도 하다. 물은 일단 들어서면 헤엄쳐 건너거나 빠져 죽거나 사이의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특히 로빈슨 부인(앤 밴크로프트)이 뿜어내는 거부할 수 없는 관능은 벤자민에게 최고의 쾌락이자 치명적 위협이란 양면을 갖는다. 로빈슨 부인이 이 모든 물의 대표 격이다. 관능의 화신인 로빈슨 부인은 청년 벤자민에게 성애와 쾌락을 알려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후견인이지만 더불어 금단의 열매이기도 하다. 


로빈슨 부인은 동시에 196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사회적 통념과 질서를 대표한다. 금단의 열매를 땀으로써 벤자민은 단숨에 성인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되지만 그 순간 그는 그가 속한 집단에서 이단아가 된다. 더는 엄친아가 아니다. 로빈슨 부인을 통하여 벤자민은 미성년기와 작별한다. 그가 맞닥뜨린 성년기는 불안과 무기력 대신 열정과 투쟁을 제안한다. 


로빈슨 부인과 불륜 이후 찾아온 그의 딸 엘레인(캐서린 로스)과 사랑은 엄친아로 살아온 벤자민의 과거를 영원한 과거로 만든다. <졸업>이 다룬 벤자민이란 청년의 삶의 아주 짧은 시기는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개로 치면 털갈이의 시기이고 곤충으로 치면 변태의 시기로, 변화가 뚜렷하지만 사실 삶을 규율하는 틀은 그 전과 후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각성과 질주가 삶을 지배한다. 변태가 시작되기 전에 순응적 질주가 있었다면 변태하며 주체적 질주가 시작된다. 할 일 없는 개처럼 ‘잠시’ 빈둥거리는 사이에 로빈슨 부인이라는 치명적 유혹이 찾아왔고, 공교롭게도 이어서 로빈슨 부인의 딸이 진정한 사랑의 이름으로 찾아온다. 순서가 반대였다면 벤자민에겐 더 없는 행복이었겠지만, 그랬다면 그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없었다.      


마냥 행복하고 진취적인 젊은이들     


이 질주에는 건강한 측면과 사악한 측면이 모두 발견된다. 당시 시대상을 감안할 때 의미상으로는 모호하지만 이미지로는 뚜렷하게,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영화가 고발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로빈슨 부인, 벤자민의 부모 등 기성세대는 악의 세력이다. 로빈슨 부인은 벤자민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벤자민의 부모는 대학원 진학 등 엄친아 삶의 프레임을 계속해서 자녀에게 강요한다. 엘레인 부모(그 중 한 사람이 로빈슨 부인이다)는 엘레인과 벤자민의 사랑을 방해할 뿐 아니라 엘레인을 억지로 다른 사람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벤자민은, 잠시 유혹에 빠져 방황했지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곤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직진하고 직진할 따름이다. 마치 공주를 구하기 위해 용과 같은 어두운 세력과 싸우는 기사처럼 그려졌다. 이러한 형상화는 동화의 구조를 닮았다. 


월남전이라는 시대 분위기와 자유를 구가하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후경으로 깔린 가운데 인습과 규율을 넘어서 주체적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의 경로를 열어가는 진취성과 리버럴한 취향을 담아내었다.


인륜과 성도덕에 대한 무시와 함께 결혼식이 열리는 ‘신성한’ 교회를 찾아가 결혼식을 깽판 놓은 것에서도 ‘진취성’과 ‘리버럴한 취향’이 확인된다. 교회는 공주가 감금된 성(城)처럼 그려지며 아메리카의 정신적 토대인 ‘신성한’ 십자가마저 흉기로 사용되고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밖에서 문을 잠그는 용도로 활용된다. 이러한 말하자면 신성파괴가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 매 주일에 그런 풍경이 실제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기성세대에 의해 모범생으로 양육된 벤자민은 기성세대의 가치와 규범은 모두 파괴하는 대각성을 분출한다. 홀로 음습하게 공항에 숨어들어온 첫 장면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엘레인, 즉 약탈한 신부와 함께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떠남은 ‘졸업’이며 이때 이 졸업은 여러 의미를 함축한다. 

    

마녀사냥과 이분법의 세계관      


영화적 완성도와 결부된 동화적 구조는 많은 관객을 열광하게 하지만, 동화적 구조에 필수적인 이분법은 세계의 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세계의 진실이란 것은 말하자면 언제나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법인데, 동화는 그것을 하나의 면 하나의 층으로만 그려내어야 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영화 <졸업> 속의 기사 벤자민에게는 그의 사랑을 훼방 놓는 용들만 있는 게 아니라 마녀도 있다. 마녀가 누구인지는 한눈에 들어온다. 엔딩에서 로빈슨 부인이 벤자민을 향해 음성이 소거된 채 욕설을 내뱉는 장면(소리가 없어도 표정으로 알 수 있다)은 이분법을 전제한다. 철없는 청년을 유혹하여 실족하게 하고, 자신이 유혹했음에도 관계의 시작을 벤자민이 자신을 강간한 것이라고 왜곡하는가 하면 벤자민과 엘레인의 진실한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나쁜 짓을 다하는 여자. 후안무치한 이 부르주아 여인을 중세 버전으로 번역하면 마녀이다.


이분법은 세대에서도 나타난다. 앞서 언급하였듯 기성세대는 악으로, 젊은 세대는 선으로 그려진다. 특히 벤자민이란 한 남자를 공유하는 모녀 사이의 세대구분은 더욱 선명하다. 엄마는 관능과 쾌락의 화신인 반면 딸은 순수와 청순 그 자체로 그려진다. 영화는 벤자민의 두 사랑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전자는 불륜, 후자는 (진정한) 사랑.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 사이의 사랑은 철저하게 성애 중심으로, 대화마저 필요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침내 벤자민은 엘레인을 구하고 벤자민도 엘레인으로 인해 구원받는다. 익숙한 구도이다. 


내가 영화 <졸업>을 처음 본 때와 비교해 그 사이에 나이가 많이 들어서일까, 나는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런 영화적 작업에서 불가피하게 추락해야만 한 로빈슨 부인이란 캐릭터에 주목하게 된다. 1960년 후반 아메리카의 부르주아 마녀로 그려진 그의 고독과 슬픔이, 제작 의도와 무관하게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졌다. 허위의식과 관능으로 무장한 육체의 악마로 그려졌지만, 영화에서 제시한 사소한 정보들을 모아가다 보면 관객은 그의 소외와 추락을 연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로빈슨 부인을 둘러싼 실존적 고통의 분위기가 흐릿하여 더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 로빈슨 부인이 악다구니를 치는 엔딩에서 나는 이미 작고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연출에 섭섭함을 느꼈다. 한편으론 이러한 전면적이고 불가역적인 소외를 통해 로빈슨 부인의 슬픔을 더 부각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꿈보다 해몽이었을까.


엄마와 딸이 모두 한 젊은이를 두고 경쟁하고, 젊은이는 온갖 방해 책동을 넘어서 두 여성 가운데서 더 젊고 더 순수한 여성을 쟁취한다는 구도는 영화 속 벤자민 나이인 20살 남성, 나아가 모든 남성의 고루한 성적 판타지를 반영한다. 모녀의 인륜은 상대적으로 너무 가볍게 그려진다. 버클리로 자신을 찾아온 벤자민에게 비명을 한 번 지른 것으로 엘레인은 인륜을 극복할 명분을 쉽게 얻는다. 


엘레인이 인습과 보수성을 넘어 사랑만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실현한다는 측면에서 리버럴한, 또는 히피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의 돌파는 전적으로 벤자민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여성적’이고 또한 ‘가부장적’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이 너무나 무력하게 자발적 대상화의 영역으로 넘어가 있기에 분명 (그런 말이 성립하는지 모르겠지만) ‘남성주의’ 영화로 분류함이 마땅하다. 따라서 졸업의 주체는 남자이고 적어도 이 영화에선 여자가 졸업하지 못한다. 여자는 여전히 트로피에 불과하다.      


The Sound of Silence     


그럼에도 <졸업>은 좋은 영화이다. 영화가 철학을 담아내지만 철학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좋은 영화이다. 일면적 세계 해석을 통해, 그 두드러짐을 통해, 그 결여를 통해 오히려 세계를 성찰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남성 중심적이란 한계를 갖지만 무엇보다 청춘의 ‘통과의례’의 전형성을 창출했다는 측면에서 영화사적 의의를 지닌다. 반세기가 더 지났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매혹적인 영화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데에는 사이몬&가펑클의 영화음악 또한 한몫하였지 싶다. ‘The Sound of Silence’, ‘Mrs. Robinson’, ‘Scarborough Fair’, ‘April Come She Will’ 등 영화와 잘 어울리는 그들의 노래가 영화 보는 재미를 배가한다. 


더스틴 호프만은 이 영화로 데뷔하여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겼다. <졸업>에 캐스팅될 때 작은 키와 볼품없는 외모로도 할리우드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나름의 관행 파괴가 화제였다고 한다. 당초 로버트 레드포드를 벤자민 역에 캐스팅할 생각이었지만 너무 잘 생기고 너무 똑똑해 보여서 그 반대로 보이는 호프만에게 기회가 돌아갔다는 후문이다. 


영화에서 다른 세대로 등장한 앤 밴크로프트와 더스틴 호프만ㆍ캐서린 로스는 실제로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는 않는다. 밴크로프트 1931년생, 호프만 1937년생, 로스 1940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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