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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getting it up?

마리아의 판테라 유복자 입양기

by 안치용

그의 부활. 그것은 기적적인 사건이지만 기독교의 주장과 달리 지속적인 사건이진 않다. 마리아의 부활한 아들은 왜 우리 곁에 남지 않았을까. 부활한 그가 다시 떠났다. 부활의 완성으로, 머무름 대신 떠나감을 택했다. 라마 사박다니. 그가 때맞추어 떠남으로써 기독교가 성립할 수 있었지만, 기독교는 그를 배반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대심문관 이야기가 웅변하듯 기독교와 예수는 양립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부재를 형상화한다는 측면에서, 또한 형상화에 그치지 않고 부재를 완벽히 대체한다는 측면에서 붕어빵을 선취한다. 떠남은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의 직유이고, 기독교는 세상에 대한 그의 경멸의 은유이다.


그것이 책갈피에 낀 붉은 단풍잎처럼 다리 사이에 바스러질 듯 얌전하게 시들어 있다. 하나님이 그곳에 무력하게 함께 시들어 있다. 루터식으로 말해 공재(共在)한다. 임포에 공재하는 신이라서 나는 그분을 믿는다. 또한 나의 그것을 나와 함께 들어 올리려고 애쓰시는 부활한 하나님을 본다.


Who is getting it up?


언젠가 스티븐이 『율리시스』의 이 문장을 두고 누가 발기했느냐나, 누가 주관했느냐가 모두 가능한 번역이지만, 문맥상 발기보다 주관이 더 타당한 번역이라고 말했다. 대단한 발기인이자 영문학자인 스티븐은 다만 번역 차이의 설명을, 제임스 조이스 권위자의 오역을 지적하는 용도에 덧붙여 조이스를 능가한다고 장담한 자신의 음담패설을 치장하는 학문적 액세서리로 썼기에 강조점은 오히려 발기였다. 조이스에게 발기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때도 봄에 언 땅을 뚫고 싹을 틔울 준비를 하는 겨울의 씨앗처럼 이면에서 작동한다. 원래 발기란 게 겉보기와 달리 표면의 현상이 아니다. 심층수가 솟구쳐 표층수를 밀어내는 근원적인 움직임을 닮았다. 그러나 심층수가 충분히 솟구치지 못하면 용승은 주저앉는다. 곧 소년이 가고 소녀가 오면 용승이 재개되지만, 나는 아기 예수를 떠나 보내지 못한다. 리비도를 관통한 타나토스의 에피퍼니. 혹은 에피퍼니를 대체한 테오퍼니.


그 들어 올려짐은 어쩌면 언제나 희망의 사건이다. 그러나 신성의 개입만이 주저앉음을 방지하고 최종적 들어 올려짐을 가능케 한다. UP의 본질은 DOWN이다. 그것이 쓰러질 때 붕괴를 막으려고 온 힘을 다하는, 십자가인 양 그것을 진 예수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밑에 깔리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깔림으로써 그가 받은 고통을 내 고통과 함께 겪어내지 못한다면, UP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임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렇게 생생하게 신성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분은 주관하시고 발기하신다. 무너짐으로써 일어선 나의 성찬식에 공재하신다.

The Resurrection of Christ, Giovanni di Paolo (Italian, c. 1403–1482).jpg The Resurrection of Christ, Giovanni di Paolo (Italian, c. 1403–1482)


그렇다고 내가 임포가 천국행 티켓이라고 믿는, 빗자루 들고 구름 쓸려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 천국이 아닌 이곳에서 그저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기로 한 그분을 믿을 뿐이다. 천국은 원래 기독교인의 몫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고 믿어 스스로 고자가 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가 천국에 갔다면 스스로 고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스스로 고자가 된 자는 결코 임포된 자가 다가간 만큼 천국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임포에 깃든 것이 거세에는 깃들지 못한다. 연민이 깃들 최소한의 여지마저 잘라버리면 신이 인간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영화 <희생>에서 알렉산더가 아들과 함께 죽은 나무를 땅에 심고 물을 주며 개화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 신이 인간에게 해주는 유일한 일인데, 심지 못할 망정 죽었든 살았든 멀쩡한 나무를 뽑아버리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신이 치과의사라면 크라운을 시술하지 임플란트를 행하지 않는다.


봉합은? 신은 외과 의사가 아니다. 그것이 흔들릴 때 애써 붙들어주고, 곧추서려는 노력이 실패해 그것이 무너질 때 그 밑에 함께 깔리며 신은 임재하고 공재한다. 자부심으로 빳빳할 때가 아니라 비루하게 흐느적거릴 때 애틋한 시선으로 우리를 안아준다. 우리가 신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가는 동안에 그가 우리에게 연민을 비처럼 뿌려준다. 해면체를 채우라고 옆구리에서 흘린 피를 엘리 엘리 기꺼이 나눠 주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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