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판테라 유복자 입양기
험한 시대를 영리하게 생존해냈지만 불시에 들이닥친 죽음을 아버지도 어쩌지 못했다. 아버지는, 잠꼬대도 일본어로 할 정도로 친일하다가 친러ㆍ친아메리카로 갈아타며 승승장구한 꺼삐딴 리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친일은 아버지의 아버지가 쌓은 업이었고, 단지 또는 우연히 친일파의 아들인 아버지는 신생 국가에서는 과도적으로 반드시 독재가 필요하다고 믿은 일종의 확신범이었다. 독재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다. 강력한 지도자, 국가발전, 혼연일체, 애국, 근대화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그 믿음이 입신양명을 위한 자기암시와 대외적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알 만큼 아버지를 겪지 못했다. 진위파악이 안 되는 명분과 별개로 그에겐 삶에 관한 통찰력이 있기는 했다. 내가 아버지의 돈에 투항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명목상의 부정 또한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부정의 대상 자체가 사라진 데다 어느 사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상주 노릇을 마치고 돈 말고는 아버지의 어떤 것도 상속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스티븐이 지적한 대로 돈 말고는 상속할 게 없었으니 전부를 상속한 셈이긴 했다. 폐부를 찌른 말이었기에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스티븐이 심하게 빈정거리지는 않았다.
내가 아버지에게 진 빚을 통해 스티븐은 나뿐 아니라 아버지와도 연결됐다. 스티븐은 아버지만큼이나 현명했다. 아버지의 아들 선발대회를 연다면, 스티븐의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시대의 흐름이 아버지에게서 스티븐으로 이어졌고, 그사이에 나는 다소곳하게 시대의 변방에 머물렀다.
정말 돈 말고 상속한 게 없었을까를 생각한다. 엄밀하게 따지고 들면 돈 말고 상속한 게 없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돈을 상속함으로써 돈과 함께 수치를 상속한 게 사실이지만 스티븐 말고는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수치심이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상대로 스티븐이 웃으며 대꾸했다. 뭣이 중헌디. 돈과 관련한 수치는 있어도 없는 것이다. 돈과 무관한 수치만이 수치스러운 법이다. 스티븐의 말에 딱히 반박할 논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삶을 총괄하면 한 발은 아버지란 덫에, 다른 한 발은 아내라는 덫에 걸렸다. 다시 생각하니 아버지라는 덫은 확실히 덫이지만 아내라는 덫이 꼭 덫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다. 임포인 남자는 아랫도리와 연관된 문제일 때 지나치게 예민해져 흔히 판단을 그르친다. 작은 살주머니에 10분가량 피를 감금하는 간단한 과업에 반복해서 실패하면, 어떤 종류이건 자존감을 지탱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구겨져 가는 삶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데 그깟 작은 살덩어리 세우지 못한다고 안달해서 쓰겠냐고 자위할 때마다 더 큰 끕끕수가 밀려왔다. 임포를 아내와 나만 안다. 아내에겐 사실 별문제가 아니고 임포는 주로 나에게 문제가 된다. 안 서는 것보다 서고 싶지 않다는 게 더 큰 문제이다. 동시에 문제가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문제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정말 서고 싶지 않은 건지는 깊이 따져보지 않았고 따져본다고 시원한 답을 얻을 것 같지도 않았다. 여우에게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빠져나올 수 있는 덫은 진짜 덫이 아니다. 아내는 운명이 준비한 무엇인가에 해당하긴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진짜 덫이 아니다. 아버지와 스티븐은 둘 다 사악한 인간이다. 아내는, 사악하지 않다. 최선의 인간이 아니지만 최악의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의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일종의 구원자로 그가 준비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을 해서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고,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라서 부끄러웠다.
마리아는 아마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을 해서 결과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나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해 미안해할 법하다. 마리아에게 결혼은 결혼이면 족했다. 그녀의 꿈은 내가 자기 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되는 것이었다. 즉 내가 자신의 남편이 되는 것보다 자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아들이 아닌 것을, 죄의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장인이 그렇게 추락해 숨지지 않았다 해도 내가 장인의 후계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렇다저렇다 의사를 표시할 계제에 도달하기 전에 장인이 허망하게 죽었다. 따라서 장인의 가업을 물려받지 못한 귀책은 내가 아닌 아내의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혹시 아는가, 지금 생각과 달리 막상 일이 벌어지자 계시를 받아서는 생물학적 아들이 없는 장인의 영적 아들이 되어 신의 섭리 안에 기꺼이 후계자 자리를 꿰찼을지. 아내의 생각이 그랬다. 그게 하나님이 나에게 예비한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마리아는, 사고 직후의 충격과 혼란에서 벗어난 다음엔 약속과 달리 나에게 빛나는 미래를 열어주지 못한 것을 외려 죄스러워하였다.
이혼을 앞둔 아내의 몸매는 처녀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금 인공적인 느낌이 생긴 것 말고는 얼굴이 처녀 적과 거의 비슷하다. 주름살도 거의 없다. 만약에 딸이 있었다면 둘이 모녀로 보이지 않고 자매로 보였을 법하다.
임포가 된 이후로 아내에게 애인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어쩌다, 정말 어쩌다 들곤 했다. 여전히 몸매가 좋고 예쁜데 애인이 없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아내에게 애인이 있으면 좋겠다. 나야 임포라서 무덤덤하게 지내고 가끔 모세를 통해 대리만족한다 치지만 청상도 아닌 아내가 수절할 까닭이 없다. 마리아가 실제 청상(靑孀)이 되었다면 기녀처럼 정말로 청상(靑裳)을 입고도 남았다. 하지만 치마 속까지는 푸르지 않은 성격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소재로 삼듯,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영화 속과 유사한 장면을 실제로 목도하더라도 질투나 분노 같은 감정이 분출할 것 같지 않다. 아내가 오르가슴으로 끓어오르는 모습을 본다면 그 상대가 내가 아니어도 그 자체로 의로운 일이다. 내가 아니어서 더 의로운 일이다. 마리아의 수태를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한 요셉이 임포였을 가능성은 없을까. 성령은 바람직한 유형의 애인이다. 바람직한 애인이 성령이 될 지경 또한 열려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왕성하지 않아도 몇 년 그럭저럭 지속된 부부의 성생활은 12일을 못 채운 아들 인생이 끝나고 기신기신 마지못해 이어지다가 어느 날 밤에 갑자기 끝났다. 임포가 될 것이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건지, 그런 말을 해서 임포가 된 건지 불명료하다. 아내가 입이 아프다고 말했다. 화를 내거나 짜증스럽게 말했으면 훗날을 기약했거나 아내를 포기하고 계산기 두드리듯 옳다구나 하며 다시 남자를 만나볼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미안한 듯 마리아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나직이 말했다. 입이 아플 때까지 빨아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은 상황에 대해선 몰염치하게도 당당해지기로 이미 결심하였기에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서는 건 내 일이어야 하겠지만, 아무튼 빠는 건 내 일이 아니었다. 입이 아플 때까지 빨다가 마침내 입이 아프다는 말을 예의를 갖추어 공손하게 내뱉은 아내. 그 고백이 드르륵드르륵 머리를 뚫었다. 독백 같기도 한데, 대답해야 하는지, 한다면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파란색 Bosch Professional이야?
아내가 입이 아프다고 말했고, 아내가 내 몸에서 입을 완전히 떼기 전에 뇌에서 보내는 다급한 신호에 해면체가 반응하기를, 공황에 빠져드는 와중에 기도했다. 구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것이 자동판매기처럼 원한다고 언제든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동전도 없었다. 기도 때문인지 혈액이 해면체 대신 뇌 쪽으로 솟구쳤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에 의해 이 집에 위리안치되었듯 뇌 속에 고인 피가 갇혀서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아래에 있어야 할 것은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에게 반란을 일으킨 루시퍼처럼 위에 몰려들어 철수할 기미가 없다. 내 신체의 무능을 아내의 건강하고 매혹적인 신체 앞에서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동안 유폐된 피가 응결한다. 머리가 터졌으면 좋겠다. 드르륵, 드르륵. 두개골을 격파하며 솟구친 피가, 분출한 용암이 마리아에게 떨어져 얼굴을 타고 흐르고, 그녀를 녹이고,
머리의 피를 아랫도리를 하방하려는 신앙인 내면의 심각한 분투를 짐작했는지 아내는, 오그라들어 간신히 몸에 매달린 그것의 끝단을 경건주의로 무장한 기독교인의 의로운 입술 끝으로 기도하듯 붙들고 있다. 하지만 입은 끝내 의로움을 저버렸다.
입이 아파.
벼랑 끝에 튀어나온 뾰족하고 작은 바위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나는 점점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팔이 아파. 온 힘을 끌어모아 마지막으로 반등을 시도했으나 끝내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태초로부터 예정한 대로 추락한다. 작은 살덩이가 중력에 굴복해 그녀의 입에서 그녀 아버지의 샅으로 떨어졌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툭.
삶이 자지의 무게에 굴복한 그 날 이후 중력에 순응한 삶이 시작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