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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알베르 까뮈

마리아의 판테라 유복자 입양기

by 안치용

그녀의 아버지가 선교를 핑계로 어머니와 함께 아메리카에 잠시 머물 때 태어난 마리아는, 국적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아메리카의 시민이 돼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모가 귀국하고도 어린 나이에 그곳에 남겨져 아메리칸으로 성장했다. 먼 한국인 교포 친척이 있었지만 외면하고 아버지는 보수적인 기독교인 아메리칸 부부에게 딸을 맡겼다. 잘못된 한국인 습성이 배일까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그녀 아버지의 바람대로 자신의 정체성에 전혀 의구심이 없는 아메리칸으로 성장했다. 다만 언어만은 영어뿐 아니라 한국어도 능숙하게 쓰도록 키웠다. 언어나 용모에서 이질감이 없었기에 한국어를 쓰는 동안 누구도 그녀가 한국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철두철미한 아메리칸이었다.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아메리카에 사는 동안 부부 중에 요셉만 그곳을 이방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이방인으로 주장한 건 당연했다. 희거나 검은 다른 주요 아메리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와 무관하게 마리아는 거기서 결코 이방인이 아니었다. 순도 100%의 이방인인 요셉은 그러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이방인임을 흔쾌하게 받아들였고 높은 순도를 즐겼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반대로 마리아처럼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다면 요셉은 오히려 불편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카에 의무적 반감을 품었지만 이방인 상태를 즐긴 데다 마땅히 가야 할 곳이나 가고 싶은 곳이 있지는 않은 요셉으로서는 아내가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한국행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아메리카에서 대충 살다가 종국에 다시 마약에 귀의하는, 이방인으로서 아름다운 결말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국한 이후 요셉은 아메리카에 다시 가지 않았다. 나이가 들며 어느새 아름다운 결말에 대한 기대가 시들해졌다. 게다가 요셉은 자신이 알베르 카뮈 같은 피에 누아르가 아닌 데다 아메리카를 모로코와 비교하는 억지를 부릴 마음이 없었다. 카뮈가 생을 마감한 방식에는 호의적이었지만, 그처럼 죽기 위해 구태여 아메리카에 돌아갈 까닭이 없었다.


까뮈에 일말의 관심이 없는 마리아가 아버지의 그 일 이후 아메리카에 돌아감에 따라, 물리적 공간을 포함해 요셉과 마리아 부부 사이의 교집합 면적이 계속 줄어들어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날 무렵에 그들의 교집합이 사실상 소멸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배우자와 펜팔이어서 관계 자체가 다르고 화상통화와 문언이라는 미디어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요셉에게 아메리카에 있는 마리아와 청소년기 어느 바닷가 소녀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추 비슷해졌다.


Kristus som tømmersvend hos Joseph og Maria (1924), Joakim Skovgaard (Danish, 1856 - 1933).jpg Kristus som tømmersvend hos Joseph og Maria (1924), Joakim Skovgaard (Danish, 1856 - 1933)


마리아는 그녀 아버지의 그 사건이 있고 난 뒤로 자신의 가족에 관해 가능한 한 언급하지 않았다. 아내의 침묵이 온당한 반응이라는 걸 요셉이 이해했기에 요셉 또한 온당한 반응을 보였다. 모태신앙인 데다 광신도와 한 끗 차이인 열렬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로서는 한국의 유명한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가 추문 속에서 급사하면서 믿음의 시험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장인에 대한 요셉의 평가는 추문이 있기 전부터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아내의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삼갔고 사건 전이나 후에 언급하지 않았기에 요셉이 아내와 이 문제를 두고 어떠한 마찰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마리아가 계속 교회에 나가긴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온갖 수군거림을 참아내며 사건 이후에도 아버지가 세운 교회에 몇 달을 계속 출석한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녀 남편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녀 남편이 그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나자 마리아는 아버지의 교회에 발을 끊었다. 주일은 물론 평일에도 교회 근처조차 피했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건 마리아에게 호흡과 마찬가지였다. 예배를 못 드리느니 기꺼이 순교를 택할 만큼 신앙이 굳건하였기에,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신앙의 습관은 강고했다. 아내의 신앙이 어떤 굴곡을 겪었는지를 요셉은 대충 짐작했지만, 혹은 전혀 짐작할 수 없어서, 마찬가지로 전혀 아는 체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워낙 알려진 기독교 집안이다 보니 마리아가 다른 교회에 나가는 것조차 구설에 오를 일이었다. 보수적인 부부관을 가진 마리아가 별거를 감수하며 아메리카로 돌아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배였다. 요셉이 아메리카에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리아는 묻지 않고도 이미 알았다. 마리아는 한국인 신자가 전혀 없는 아메리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정기적인 화상 회동 말고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따로 말을 거는 일이 드물었다. 마리아의 활동이 아메리카에서 확연히 줄어들어 있어 시차를 감안해도 부부가 대화할 시간이 충분했지만, 아마 요셉이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마리아는 느낀 듯했다.


가끔, 아주 가끔 아내의 삶을 염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요셉은 그녀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본다. 훔쳐본 아내의 삶의 현장은, 분주함은 줄었지만 여전히 역동적이어서 때로 총탄이 날아다니는가 하면 드물게 포탄이 퍼부었다.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보편적인 삶의 전장에서 씩씩하고 무난하게 잘 사는 듯했다. 자신이 해줄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요셉은 그때마다 확인했다. 마리아에게 필요한 일은 하나님이 맡아서 온전히 해주고 있었다.


요셉 삶의 전선에서는 오래전에 총성과 포성이 멈췄다. 아주 적막한 건 아니다. 즐비한 전사자 사이에서 아직 죽지 않은 부상병이 가끔 고통의 신음을 내뱉는다. 중상이다 보니 신음이 땅에 붙어서 가늘고 낮게 기어간다. 깊은 상처에서 나오는 신음은 공중으로 비산하지 않고 땅을 할퀸다. 달리는 열차 밖 풍경처럼 힐끗 보면 평온한 농촌 같을 수 있다.


요셉이 드물게 아내의 생활을 궁금해할 때가 있더라도 궁금증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요셉에게는 마리아가 한때 섹스를 함께한 사이였고, 11일밖에 살지 못한 아이를 그녀하고 낳았다는 사실이 생경하다. 그들 사이에는 어느 해 12월 말에 태어나 이듬해 1월 8일에 죽은 아들이 있다. 이방에 아들의 무덤을 만들었다가 행여 두고 떠나오는 사태가 빚어질까 우려하여 요셉은 아내의 반대를 묵살하고 그 작은 몸덩이를 화장터로 가져갔다. 유난히 추웠다. 조그만 뼈를 녹이는 고온과 자신의 물렁한 살을 에는 한기의 대조가 요셉에게 아직 생생하다. 아내와 섹스한 기억은, 입이 아프다고 말한 장면 말고는 그에게 가마득하다. 자연사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보는 암모나이트나 삼엽충 화석처럼 평범하고 비현실적이다. 마리아의 뱃속에서 열 달을 지내고 지상에서 고작 11일을 살다 간 마리아와 요셉 아이의 죽음 이후에 둘 다 까무룩 얼이 나갔다. 어느 사이엔가 섹스 또한 멈춰 있었다. 애초에 그들 섹스에 새들한 구석이 있었다. 아내가 임포를 반기지 않은 것 같기는 하나, 임포를 싫어했다는 증거 또한 없다고 요셉은 생각했다. 자신의 본성이 여성을 의욕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아내가 진즉에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기억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억은 대체로 정확하지 않은 법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노년에 기억에 기대어 살게 되는 것일까. 더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 더 빨리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요셉은 생각한다. 누가 나를 위해 파셀 베가 HK500을 죽을 만큼 빠르게 몰아줄까. 아메리카 스타일의 프랑스 자동차를 루르마랭에서 빌블레뱅까지 죽을 만큼 빠르게 몰 때 누가 기꺼이 조수석에 죽음의 동반자로 나를 태워줄까. 촌스럽게 기차표 같은 건 주머니에 지니지 말아야지. 죽음의 르 그랑 포사르에 부조리 같은 미련을 남기지 말아야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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