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나 Feb 05. 2024

제 책 사주기로 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근데 전 기억해요.

요즘 곧 서른이라는 생각이 계속 맴돈다. 무슨 말을 할 때에도 '거의 삼십 년을...'이라고 얘기한다든지, '무슨 거의 삼십 살한테..'라고 말한다든지. 얼마 전까지는 이렇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서른이란 마감기한을 마주쳤기 때문인 것 같다.


서른까지 책을 한 권 내기.




이십 대 초반을 돌아보면 전부 글이었다.


어떤 웹진 서포터즈에 지원하고, 붙어서 수많은 공연과 전시를 보며 글을 쓰고, 인디 음악에 미쳐 아티스트의 인터뷰를 하고 앨범을 리뷰하고 공연을 리뷰하고 다른 사람들의 평론을 읽고. 2-3년간은 매주 한 편씩 글을 썼다.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근력 운동 같은 것이어서, 조금씩 높은 중량을 들고 조금씩 먼 거리를 뛸 수 있게 되듯 나도 조금씩 나은 글을 쓸 수 있게 되곤 했다. 게다가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원고료도 받았다.


내 글이 나아지는 것에 대한 즐거움, 아주 적은 금액이어도 고료를 받는 프로페셔널이라는 뿌듯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 이십 대 초, '글 쓰는 사람'은 나의 아주 중요한 정체성이었다. 게다가 2015년부터 2017년에는 마침 독립출판의 붐이 일었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었고,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독립서점들이 이곳저곳 생겨났다. 나는 그 독립출판물을 보며 약간은 누구나 책을 낸다고(ㅎ)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누구나'가 되지 못했다.



책을 써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 암스테르담 생활을 돌아보는 글을 쓰고 싶었다. 나름 목차 구성도 했고, 블로그를 찾아보니 일단 그 구성을 투고해 보라길래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의 여행기도 아니고 대단히 특색 있는 여행기도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연락은 오지 않았다. 열심히 해보겠다는 생각도 한두 달 정도 했었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한 권을 엮을 만큼의 글을 써보자니 도저히 소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당시 나는 계속해서 '내 꿈은 책을 내는 것'이라는 얘기를 주위에 하고 다녔다. 친구들, 내 SNS 계정을 보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소개팅 상대에게도 이야기해 왔다. 그 당시 나의 정체성의 아주 많은 부분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으므로, 학생이고 사회학을 전공했고 이런 이야기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글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저는 책을 낼 거예요. 나오면 꼭 사주셔야 해요? 그들은 꼭 사겠다고 약속했다.


오늘, 아마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약속을 기억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2018년의 내가 쓴 블로그 글에 "어떻게든 서른 전에 한 권을 내자"는 글이 쓰여있었다. 그때의 나는 꽤 까마득한데. 어쩌면 글쓰기를 차일피일 미룰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여유로운 마감기한이었다. 서른. 근데 이제는 별로 여유롭지 않아져 버렸다.



이십 대 중반에 취업을 하고 5년 차가 된 지금까지, 글을 쓰려는 노력은 종종 했다. 그렇지만 짧은 글을 쓰는 데에만 익숙해졌고, 뭔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도 완성은 하지 않고 흘려보내곤 했다. 예전에 나는 글 쓰는 사람이었는데~ 같은 생각만 했다. 취미에 대한 글? 다시 음악 리뷰? 아니면 내 얘기? 누가 읽지? 무슨 글을 쓰지? 하다가 그냥 닥친 일을 하고 쇼츠와 릴스를 보며 웃다가 새벽에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과거의 내가 주었던 마감기한에, 글이 재밌으니 좀 더 써보라는 친구의 이야기에 다시 혹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무척 좋아했고, 언제나 다시 갖고 싶어 했으므로.


요즘 랄라스윗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추억에 잡아먹힌 사람처럼 신보도 아니고 2014년에 나온 앨범만 돌려 듣는다. 그 시기에 자주 들은 음악은 그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어서, 자꾸만 이십 대를 되돌아보는 글을 쓰고 싶다. 못쓰겠으면 20대에 썼던 글이라도 마음에 드는 것들을 묶어 인쇄물로 갖고 싶다.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 두는 것 같죠? 같이 모른 척 부탁합니다.)


어떤 글을 써보겠다고 다짐하는 글만 다섯 번째쯤 될 것이다. 지겹지만 시작을 해야 뭐라도 하지 않겠냐며 변명해 본다. 밤이 깊었다. 스물아홉의 나는 고지혈증을 걱정하지만 오늘도 초콜릿을 먹었다. 내일 아침에는 헬스장에 뛰러 가야 하니 이만 글을 줄인다.




소개팅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딱 몇 줄만 더 하고..

책을 사주겠다고 얘기한 사람 중에서, 누군가는 이 브런치를 그 자리에서 구독해 줬다. 누구였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브런치를 구독하실 그분(들)께, 감사합니다.


근데 책.. 사주실 거죠?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 올레길 따라 2만5천보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