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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Jun 14. 2021

제주 올레길 따라 2만5천보 (2)

올레길 패스포트를 사면 올레길에 후원도 되고 명예욕도 차올라요

다음 이야기로는 올레길의 섬세한 깃발들과 안내판, 올레길을 후원하고 여행객의 발길을 조종하는 사악한 파란 수첩, 이에 따라 아작 난 허리가 준비되어 있다. 다음 이야기까지 꼭 찾아주시길 바란다. 나도 다음 이야기를 꼭 쓰기를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난지 한 달 반이 흘렀다. 제주의 바닷바람은 모조리 빠져버렸고 연두는 시퍼런 초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야기를 꼭 끝내고 싶다.


전에 말했듯 혼자 하는 여행에서 차도 없는 사람에게 할 일은 별로 없다. 하염없이 걷는 것 뿐. 그래서 나는 올레길을 선택했고, 다행히 볕이 뜨겁지 않은 4월이었기 때문에 찬 물이 든 텀블러와 함께 꾸준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올레길의 유일한 단점은 땡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 부족 여성을 계속 걸을 수 있게 했던 건 아래에서 이야기할 이 파란 수첩이었다.


한참 4코스를 걷다가, 들어가고 싶은 관광안내소를 발견했다. 나는 (보지 않더라도) 웬만하면 관광안내소에 들러서 그 지역의 지도를 받곤 한다. 지도 자체는 쓸모가 없는 편에 가깝지만 이 도시에서 어떤 관광지를 추천하고 싶은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은 '독립서점 지도', '오름 지도'처럼 여행객들의 취향을 고려한 커스텀 지도들도 많다.


올레 공식안내소라고 쓰여있는 파란 건물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상품을 구경했다. 조랑말 모양의 냉장고 자석, 두건, 그리고 수첩. 단순한 수첩이 아니라 그 안에 올레길 코스들에 대한 정보가 있고, 올레길 코스마다 두 페이지 정도를 할당해서 빈 공간도 좀 있는 수첩이었다. 나는 현장을 지키시던 올레지기 선생님께 말을 걸었다.



출처: 제주올레스토어


"이건 뭘 찍는 거에요?"

"저기 밖에 도장 보이시죠, (마침 중무장한 등산객 아저씨가 도장 박스 앞에서 도장을 찍고 있었다.) 저걸 찍는 거에요. 시작점, 중간, 끝에 3개씩 있어요."

"오~ 그럼 이건 얼마에요?"

"2만원이에요."

"넹?"


넹?

이만원이요?

20,000원?

...책값인데?


별다른 꾸밈도 없이 손바닥만한(b6 정도 되지 싶다), 파란 천 커버의 수첩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격이었다. 대충 6천원 정도 생각했다. 그냥 다른 수첩 사서 거기다 찍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올레길은 사단법인 제주에서 관리해요. 국가에서 하는 게 아니라서, 후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다음 올레길을 걸을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요. 쓰레기도 줍고, 오시는 길에 리본 보셨죠? 그것도 정비하고요."


일단 이 길이 국가에서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놀랐다. 당연히 제주의 대표 관광상품이니 국가 소관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단법인이라니?


게다가 내가 이 수첩을 사면 다음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더 편해진다고 설명하시자 그 내용이 갑자기 마음에 콱 하고 박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는 내내 올레길의 섬세함에 감탄하면서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레길은 카카오맵과 연동이 잘 되어 있어서, (아마 카카오맵과 제주시가 함께 협약을 체결한 것 같다.) 카카오맵 기본 지도에도 올레길은 눈에 잘 띄는 파란색으로 표기되어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막상 지도는 별로 켤 필요도 없었는데, 이게 다 리본과 화살표 덕분이었다.


출처: 제주올레

왼쪽에 있는 리본은 키가 큰 나무의 낮은 나뭇가지에 묶여있기도 하고, 바다 앞 허전한 전봇대에 묶여 있기도 하다. 두 색깔의 리본이 케이블타이로 튼튼하게 묶여 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여기쯤일까'할 때 보인다는 것이다. 대강 생각해도 3-4분에 한 번씩은 보이는 것 같다. 나 잘 가고 있나-하는 의심이 드는 여행자에게 계속 걸어가면 된다고 조용히 일러준다. 애매한 갈래길에는 기가 막히게 묶여 있다. 감탄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리본은 제주 바다의 파란색과 제주 감귤의 주황색을 따와서 주황과 파랑색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사실 다홍색과 파랑색에 가깝다. 아무렴 좋다. 눈에 잘 띄면 목적은 이뤘다.


오른쪽 이정표는 커다란 갈림길에 있다. 마을 입구라든지, 절대 잘못된 길로 빠지면 안되는 산 입구의 갈림길이라든지. 파란색 화살표는 순방향으로 걸어가는 여행자들을 위한 표식이고 주황색 화살표는 역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표식이다. 이 섬세함 앞에 이쯤되면 털썩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요, 이 길을 이렇게 편하게 혹은 더 깨끗하고 아름답고 편하게 만들 수 있다면. 이만원 수첩, 사겠습니다.


(2만원 쓰면서 과하게 비장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당시에는 꽤 거금이라고 느꼈다. 6천원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지 싶다.)



선생님은 잘 생각했다면서 수첩의 효용성을 더 설명하셨다.


"다 걸으시고 도장 모두 찍어오시면 명예의 전당에도 올려드려요. 수료증도 드리고 홈페이지에도 올려드리고요. 이번에 걸으시고, 다음에 제주 와서 또 다른 곳도 가보시고 또 걸으시면 되고요. 이렇게 오시는 분들 많으세요. 그리고,"

선생님은 약간 간격을 주면서 강조했다.


"이 수첩이 있으면 더 많이 걷게 될 거에요."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나는 여행 코스를 짜면서, 오늘은 몇코스를 걸어볼까- 어디서 도장을 찍어볼까 고민했고 더 많은 올레길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올레 코스 출발지까지 버스를 타고 도장을 찍고는 근처 카페를 돌다가 집에 온 날도 있었다. 수첩을 깜빡하고 안가져온 날은 괜히 걷기가 싫었다. 그렇게 열흘 동안 찍은 도장이 8개 정도 된다. 4,5,6,7코스를 돌아다녔지만 모든 곳에서 찍지는 못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정말 명예의전당이라는게 있었다!

"제주올레 425km 26코스를 모두 걸은 완주자들"


완주자들이라니.. 정말 인생 끈기있어 보이고 성실해 보이고 멋지다. (실제로 끈기있고 성실하고 멋진 분들이시겠지만... 그게 이렇게 광역의 범위에 드러나는 기회는 좀처럼 없다.) 게다가 완주하면 한 마디씩 남길 수도 있는가보다.

 

"구간 완주지점에 숙소 많이 필요" 처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남긴 분도 계시고,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처럼 상냥한 퍼가요 멘트를 적은 분도 계시다. "조금 짧아도 좋을 듯 합니다." 꽤나 힘드셨던 모양이지만, 역시 해낸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멋지십니다!


제주올레 홈페이지

벌써 고민이다.


완주하면 무슨 말을 적을까. 페퍼톤스 가사를 한 귀퉁이에 적어볼까. 엑소 세븐틴 사랑해 영원하자? 아니면 비장하게 late better than never 이런 글...


난 아무래도 수첩과 올레길의 리본들에게 공을 돌려야할 것 같다.

그 전에 올레길을 완주해야겠지만... 그치만, 어떤 분의 명예의전당 후기처럼 시작하게 되면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 내 수첩은 이미 도장 찍기 레이스를 시작했다.


완주하면 글 쓸 힘도 없을 테니까 여기 미리 적어둔다.


"더 겸손하게 많이 걸으라는 의미로 주신 상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영광을 파란색 수첩과 올레길에 매여 있는 수많은 리본에게 돌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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