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 놓고 2만 5천보를 걸으면 운동화가 걸레짝이 되고 점심때를 놓칩니다
올레길의 캐치프레이즈는 '놀멍 쉬멍 걸으멍'이다. 놀면서 쉬면서 걸으라는 뜻인데, 이 글은 놀지도 쉬지도 않고 걷다가 허리가 아작나버린 올레길 기행 이야기이며 그럼에도 올레길에 다시 가겠다는 다짐이다.
제주, 원 웨이
퇴사일을 정하고 다음 입사일을 정한 뒤, 나는 그 사이 제주로 가는 편도 비행기표를 샀다. 편도를 산 이유는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실용적인 이유 이외에도 간지를 위해서라는 음흉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누구나 마음속에 베를린의 하정우가 외치는 '블라디보스톡, 원 웨이'를 품고 산다고 생각한다.
퇴사 소식을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은 쉬면서 뭐할 거냐고 꼭 물어본다.
"저 제주도 가기로 했어요. 흐흐. 다음 주 화요일에 가서 보름 정도 있을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아요."
옅은 미소와 함께 이 정도로 운을 띄우면 사람들은 눈썹을 약간 올리고 숨을 살짝 크게 들이쉰 뒤 말한다.
"편도예요?!"
정확히 이 반응을 기대했으므로 흡족해진 마음을 안고 대답한다.
"네 흐흐."
올레길 걷는 글을 편도 비행기표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돌아오는 비행기 편이 정해진 이유가 올레길에 넋 놓고 걸었다가 아작 난 허리이기 때문이다.
혼자 국내로 뚜벅이 여행을 떠나게 되면 생각보다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특히 제주처럼 박물관이 많다거나 유명한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자연을 만끽하러 가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뚜벅이 여행자에게 24시간 중 자는 시간, 먹는 시간, 그리고 어딘가를 감상하고 관람하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은 대부분 걷는 시간이 된다. 게다가 제주는 걷는 자를 위해 만들어둔 425km의 올레길로 유명한 섬이다.
출발 전 나의 제주 일정은 '올레길 걷기'가 전부였다.
점심때를 잘 맞춰 걷자
여행 둘째 날 아침.
나는 숙소가 있는 제주의 남쪽, 귤의 고장, 남원읍에서 걷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한 포인트는 약간 예상치 못한 지점이었다.
아침으로 마실 두유를 사러 잠깐 편의점에 나갔다가, 2+1 행사를 하는 것을 보고 "흠, 2개는 숙소에 가져다 놔야겠다"라고 생각해서 세 개나 샀다가, 숙소 가는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바로 올레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가방이 예상외로 무거워졌다는 뜻이다)
길을 잘 찾는다는 건 나의 몇 안 되는 자부심 같은 거라서, 나는 가까운 곳에 이동할 때에는 대략적인 방향만 생각하고 어느 골목길이든 일단 걸어가고 본다. 올레길 걷기에 처음 나선 날도 그랬는데 제주의 길은 서울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자란 소나무의 가지 같이 생긴 골목길들이 이어져 있을 줄 몰랐다. 남쪽을 향해 걷다 보면 분명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따라 가면 서쪽이 나와버리는 골목길들이었고, 이상하게 우거진 가로수들에서는 최신형 최고급 사양 돌비 서라운드의 새소리가 쏟아져 나를 감쌌다. 새를 무서워하는 내게 황홀감은 0에 수렴했고 두려움만 몰려왔다. 나는 우다다 걸어서 길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바닷가 올레길에 갑자기 접어들어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큰엉이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님이 추천해준 장소였고, 숙소에서 걸으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나는 계속해서 걸었고 내내 이 환상적인 뷰에 대한 기분 좋음을 노래하면서 다녔다. 다행히 혼자 다녀서 흥얼거리는 노래나 에어 팟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춘 갑작스러운 춤사위에 (아이즈원이라든지 레드벨벳이라든지) 창피해하며 면박을 줄 일행도 없었다.
그렇게 큰엉에 갔고, 남들은 차를 세워놓고 살짝 걸어보는 길을 깊숙이 돌아다녔다. 큰엉은 무척 아름답다! 올레길 4코스를 걷는 사람에게는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큰엉에서 또다시 돌비 서라운드의 새소리를 들으면서 새천년 건강체조 시작에 나오는 새소리가 실제 새소리를 녹음한 것일 거라는 확신이 굳어졌다.
원래대로면 큰엉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지만, 배도 별로 안 고팠을뿐더러 걷다 보니 가고 싶었던 식당으로 빠지는 길을 놓쳐버렸다.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먹어야지, 하고 걸었는데 시간이 벌써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참고로 아침으로는 두유 한 팩을 먹은 차였다. 당이 떨어져 헤롱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마저 두유 한 팩을 뜯었다.
그 뒤로는 비슷하다. 날씨를 찬양하며 걷다가 오징어 말리는 아저씨에게 그 오징어들이 인천 석남동의 어떤 주점 거리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바다 바위들을 걸어서 넘어가라는 올레길의 무심한 시크함에 잠깐 당황하기도 하면서 계속 걸었다. 그렇게 2시가 넘었다. 어느 나무 그늘에 걸터 앉아 결국 마지막 두유 한 팩도 뜯었다. 2+1은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그렇게 별로 원하지 않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쉽게도 된장찌개는 텁텁했고 불고기는 바짝 말라있었다. 나는 물통을 새로 채울 수 있었다는 정도에 감사하면서 때늦은 점심을 마무리하고 마저 걸었다. 하루에 두 번 밖에 기회가 없는 식사를 이렇게 별 두 개 반 정도로 때웠다는 것이 이 날의 가장 큰 아쉬움이어서, 그 이후 올레길을 걸을 때에는 직장인 점심시간 챙기듯 제시간에 식사를 했다.
인생 기록 24,879 걸음
애플 건강에 의하면 나의 작년 하루 평균 걸음 수는 4,782걸음이었다. 집에서 지하철 역, 역에서 회사, 점심으로 500m 반경의 식당, 회사에서 역, 역에서 집-의 평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소에도 즐겨 걷는 편은 아니다. 기왕이면 앉거나 눕는 것을 선호한다. 산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걔를 쫓아다닐 때에는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양보해서 800보 정도 더 걷는 편이랄까.
제주 2일 차, 이 날은 이만 사천팔백칠십구 걸음을 걸었다. 유럽 여행을 다닐 때에도 만 이천보 이상 걸으면 인대가 늘어난다며 찡찡거렸던 사람인데.. 아무래도 뭐에 단단히 홀렸나 보다 내가(혹시 불한당 안 보신 분?). 나의 임시완은 사실 제주 바다였던 것이다- 제주 말로 하면 바당! (귀여워! 바당! 제주 바당!)
여행 이틀 만에, 대충 가볍게 신으려 샀던 검은색 실내용 운동화는 제주와 2만 5 천보를 만나 너덜너덜해졌고, 마스크 위의 얼굴 중에서도 이마는 먹음직스러운 초콜릿의 색깔로 그을렸다. 나는 급히 서귀포에 하나밖에 없는 나이키 매장에 가서 스트럭처 운동화와 흰색 모자를 샀다. 싸온 바지들이 전부 아디다스라는 것이, 그리고 유일한 패션 조언처럼 삼고 있는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섞어서 입는 것 아니다"라는 말이 아른거렸지만 아디다스 매장을 찾아 헤멜 발목 인대와 고관절이 남아있지 않았다.
운동화는 튼튼하고 예쁘지만 꽤 비쌌다. 그렇지만 오늘 내내 현무암을 맨발로 밟고 다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바닥이 두껍고 현무암 따위는 가볍게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은 운동화를 지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주식으로 15만 원 손익 실현도 했다 호호.
위에서 이야기한 산책을 좋아하는 친구는 내가 이 날의 걸음 기록을 자랑하자 이미 육신은 죽어버리고 영혼만 남아서 보내는 메시지가 아닌지 의심했다.
이 날 열심히 육신을 풀어주고 잔 덕에 그 이후에도 많이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덕분에 2021년의 평균 걸음수가 2020년보다 천 보 정도 늘어났고, 2만보를 넘게 걸은 날은 3일 정도 더 된다. 그렇지만 이 날이 최고 기록이었다.
다음 이야기로는 올레길의 섬세한 깃발들과 안내판, 올레길을 후원하고 여행객의 발길을 조종하는 사악한 파란 수첩, 이에 따라 아작 난 허리가 준비되어 있다. 다음 이야기까지 꼭 찾아주시길 바란다. 나도 다음 이야기를 꼭 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