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은 자존감
어느덧 내 나이 40대가 되었다. 언젠가 친 누나가 40대와 소개팅을 한다고 하면 "그 남자는 그 나이 먹도록 왜 아직 결혼을 안했대? 백퍼 어떤 하자 있을듯." 이라고 했던 나인데 이제 내가 그 남자다.
남들만큼의 철이 들기까지 참 오랜 방황을 했다. 돌고 돌아 서른이 다 되어서야 세 번째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그만큼 취업도 늦었다. 사회생활의 시작이 늦다보니 모든 것이 보통사람들보다 늦다. 누구는 일찌감치 돈도 잘 모으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사고 주말마다 가족과 여행도 잘 다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2년 전 코인 사기를 당해 열심히 빚을 갚는 중이고 아직 미혼이라 당연히 아이가 없고 집은 월세고 주말에 여행을 같이 갈 여자친구도 수 년 째 없다.
우와,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히키코모리?
위에 나열한 사실들은 내 자존감을 위태롭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동 나이대의 생활, 환경에 비해 나의 경우 상당부분 차이가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이 타인의 삶보다 나아지길 원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그들과 비슷한 모습은 갖추고 싶어 한다. 쉴새없는 비교를 통해 만족감을 얻는 게 인간이다. 그게 정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을까.
참 다행이다. 나는 비교에 상당히 둔감하다. 외부요인에 의한 감정소모가 적다. 당연히 누군가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부러워하며 스스로 애써 초라해지지는 않는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을 넌 왜 안 하냐는 말이 가장 의아하다. 일찍 취직하면 더 좋은 선임을 만나고 일찍 결혼하면 더 좋은 동반자를 만나나? 둘러보니 그렇지도 않다. 조바심을 내며 남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 싶다. 뭐 그런 말이 불쾌하지도 않다. 어쨌든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인 걸 아니까 잘 웃어넘긴다.
결론적으로 나는 행복하다. 사는 게 참 재미있다. 도전하는 삶, 자유로운 삶,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함께 사는 고양이들은 하루종일 웃음을 준다. 코인사기만 아니었으면 극한의 행복에 놀라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엄마)이 사실 불행하면서 행복한 척 하지마라고 말씀하셨다. 억울했다. 난 분명 흔한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소소한 것들에 만족하며 잘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서 여태 개의치 않았던 요소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금은 괜찮은데 만약 수 년 뒤 내가 미혼에 아이가 없는, 일반적이지 않은 성인 남자라는 사실에 계획에 없던 외로움이나 자괴감을 느끼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주변의 시선따위 신경 쓰이지 않는 건 현재의 이야기일 뿐이고 언젠가는 노총각이라고 비아냥대는 주변인들의 수군거림이 불현듯 내 귓속을 파고들지는 않을까? 많은 것을 돌이킬 수 없을만큼 멀리 와버린 어느 시점에 나의 탄탄한 방어력이 너덜너덜 현저히 낮아진다면?
1년에 두 번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점점 와이프들을 데리고 나온다. 이 모임이 나에게 주는 으쓱함은 그야말로 짭짤하다. 자랑좀 하자면 친구들의 와이프들은 모임에서 만날때마다 하나같이 내게 칭찬일색이다. 왜 혼자 머리숱이 많냐, 배가 안 나왔냐, 술담배를 안 하냐, 그래서 그런지 열 살은 어려보인다 등.
어깨가 절로 으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임이 이제는 자녀들까지 함께하는 모임으로 최근 색깔이 바뀌면서 실제로 나는 낯선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기분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나만 결혼을 안했고 나만 아이가 없다는 딱 그 사실만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다. 식당에 가면 다들 아이들을 챙기고 먹이고 돌보느라 본인들은 잘 먹지도 못하는데 나는 혼자라 꾸준히 고기를 집어먹는 모습, 아이를 키워본적이 없으니 영유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만 서투른 모습,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부터 점점 줄어드는 말수. 나 말 하는 거 좋아하는데.
슬슬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고 에스트로겐 수치가 증가하는 것인가. 호르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느 날 사람들이 나를 동안으로 봐주지 않으면 어쩌지?
아하, 분명히 나는 예전에 비해 남들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양이보다 먼저 죽으면 우리 예쁜이들 불쌍해서 어쩌지?
오만가지 상상을 한다는 건 아주 편안한 심리는 아니라는 거다.
그러면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사실은 오래된 세뇌의 결과인가 싶기도 하다. 아니 분명 나는 행복하다. 지금도 누가 묻는다면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그래서 좀 헷갈린다. 나는 정말로 만족스럽게 살고 있나? 나는 정말로 보통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안 받나? 나는 정말로 남들 시선따위 상관없나?
살짝 헷갈린다. 아니,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도 모르는 나를 마주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분명 생겼다.
상상을 이어간다. 결혼을 영원히 안 하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나도 모르는 나를 대비하기 위해 어떤 무기를 만들어 놓아야 하는가.
미혼인 똑같은 여성을 두고 노처녀라 칭하는 것과 골드미스라 칭하는 건 느낌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결혼해서 아이낳고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사이에서 모르긴 몰라도 골드미스는 주변 시선에 의한 타격이 적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노총각 말고 다른 표현이 있는지 찾아봤다. 우와! 있다. 그런 표현.
"다이아미스터"
[능력있는 30~40대 독신 남성을 뜻하는 골드 미스터에 외모를 꾸미는 데 투자하는 그루밍족의 특성까지 가진 남성을 기존의 여성인 골드미스라는 개념에 대비해 지칭하는 말이다. 갈수록 결혼 적령기가 늦어지면서 소비력을 갖춘 다이아미스터가 늘고 있다. 미용, 화장품, 패션, IT 등 다이아미스터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서는 이들을 겨냥한 상품을 발빠르게 출시하고 있다. 병원의 경우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시술을 원하는 고객을 겨냥해 최신 의료기를 도입하는 곳이 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역시 남성 패션의류 구매고객 중 다이아미스터의 비중이 늘면서 옷 뿐 아니라 넥타이, 벨트, 시계, 구두, 향수에서 이들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젊음과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기능성 화장품도 다이아미스터들이 주 고객으로 떠올랐다.]
라고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와있다.
이 다이아미스터라는 단어를 발견하자마자 장래희망을 정했다. 내 꿈은 다이아미스터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다. 머리가 단번에 맑아졌다. 나는 여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