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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키 Jan 17. 2024

심장을 팔아 돈을 벌다

우리 인간이 돈을 버는 이유. 써야 되니까.

생활비 충당. 삼시세끼 먹어야 하고 월세든 전세든 자가든 잘 곳이 있어야 하고 벌거벗고 다니지 않으려면 입어야 하니까. 아플 땐 병원비가, 배워야 할 땐 교육비가, 어울리려면 여가비가 필요하니까.

삶의 모든 것에 돈이 연결되어 있다. 돈이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얼마나 중요하면 벌려다 과로로 죽는 경우도 있다.

목숨과 맞바꾸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소중한 무언가를 자꾸 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는 언제나 설렌다. 강의의뢰전화일 수도 있으니까. 

오호. 강의는 아니지만 1:1 스피치 코칭에 대한 상담요청이었다. 상담은 무료니 일단 사무실로 초대했다. 29세의 직장인 남성처럼 생긴 29세의 직장인 남성은 약속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아까 휴대폰 너머로 들린 그의 목소리가 침울하고 가라앉은 것처럼 들리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목소리도 그렇고 얼굴 표정도 굉장히 어두웠다. 위험한 사람은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악수를 청했다. 헉...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래 뭐 기분 안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돈이나 벌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앉아서 상담을 시작했다.

"말을 잘하고 싶어요."

누구나 말을 이렇게 한다. 그에게 물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잘하고 싶은 건지, 대중 앞에서 발표를 잘하고 싶은 건지, 직장에서 소통을 잘하고 싶은 것인지.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잘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 때다 싶어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사람들과 대화를 잘하려면 말보다도 미소를 지을 줄 아는 게 중요해요."

나는 농담처럼 첫인상의 중요성을 꺼내며 슬금슬금 당신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음을 알려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저도 원래 이렇진 않았어요!!!!!"


스피치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입을 연 후 약 20분 내내 내가 호응할 틈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두웠던 표정은 어느새 달궈진 인덕션마냥 이글이글 타올랐다. 대체 무엇이 그의 화를 돋운 것일까.

그는 매일매일 하루종일 직장상사로부터 구박을 받고 있었다. 사소한 업무지시 하나를 받더라도 욕설과 비하를 세트로 함께 받았다. 안쓰러웠던 건 그 비하와 욕설이 항상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적인 심부름 등 부당한 업무지시도 잦았다. 무급 야근은 일상이 됐다. 괴롭힘 받으러 출근해서 괴롭힘 할당량 다 받으면 퇴근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마지막 말을 힘겹게 내뱉으며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2년 만에 성격이 변한 것 같아요, 저도 원래 밝은 사람이었는데..."


잠자코 듣느라 입이 근질근질해 죽을 뻔했다. 주변 어디에나 있는 흔한 이야기? 그게 논점이 아니다. 

나는 그가 직장에서 무난한 동료였음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아니면 희대의 빌런이었는지 확인해 본 적이 없다. 궁금하지 않았다. 폭력이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듯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합당한 이유는 없다. 대충 보아도 한 사람의 자신감과 자존감이 극도로 훼손되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는 직장에서 말 한마디 없이 소심한 존재다. 하루 중 쉬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 그러니 쉬운 일도 쉽게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 상사에게 빌미를 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일상생활의 정서적인 안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한없이 피곤하고 무기력해져 가족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불안하고 불편한 정서를 회복할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마저 사라진 것이다.

직장생활 2년 만에 한 사람의 내면이 돌이키지 못할 만큼 황폐해졌다.


같이 그 상사를 욕해주고 싶었다. 아니 친 형인 척 전화해서 괴롭히지 말라고 엄포라도 놓고 싶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멋지고 실질적인 조언을 할 차례였다.

그렇지만 난감했다. 나는 과거 직장이 나와 맞지 않았던 수차례, 뒤도 안 보고 사표를 던져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건 내 인생이니 내 맘대로 가능했던 거고, 그럴 땐 나처럼 쉽게 쉽게 그만두는 거라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조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는 사정이 있나요?"

답변은 뻔했다.

"백 번 천 번 때려치울 생각을 해봤지만 언제 또 다른 곳에 취업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해서요."

당연하다. 누구나 그 점이 불안하다.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과감함 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내 생각은 확고히 다르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돈을 버느라 돈보다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은 아닌지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나 자신을 이대로 놔둬도 괜찮은가. 그런 회사에서 살아남아있는 난데 사실 다른 곳에서는 능력자가 아닐까. 지옥 같은 직장생활을 버텨내는데 쓰는 에너지를 고스란히 재취업준비로 옮기면 어디든 불러주는 곳 하나 없을까.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면 적어도 현재보다는 나은 삶을 마주할 거라는 기대를 해야 한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쓰레기 같은 회사(그들의 표현)를 고민 끝에 그만두고 만족스러운 새 삶을 시작한 사례가 적지 않다. 

제약영업을 하던 고등학교 친구 똥칠이(본명 아님)는 사장님보다 영업실적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해마다 시도했던 연봉협상에서 번번이 거절당하자 고심 끝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직접 사업체 운영을 시작했고 현재 수억 대 매출을 올리는 사장님이다. 

대학 동기 좐(한국사람임)은 세모군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두 살 많은 팀장의 매일 같은 갈굼을 벗어나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시험공부를 한 결과 9급 공무원 시험에 두 번째로 합격 후 네모군청으로 발령, 거기서 따뜻한 선배들을 만났을 뿐 아니라 아리따운 동료와 결혼도 했다. 부럽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 선택이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그 미래가 그때 그 선택으로 인한 것인지 인간은 알 수가 없다. 그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기보다 발버둥은 쳐봐야 한다는 것. 


이 많은 생각을 그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나는 한 마디만 했다.

"회사 그만두고 다시 오세요. 스피치는 마음이 편안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달 뒤 문자로 소식을 알려왔다. 코칭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직장은 그만뒀고 바로 그것이 사람들과 다시금 대화를 잘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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