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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y 09. 2023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

2200번 타고 서울에 나가는 길, 작은 친구를 만났다.


입석이 금지된 광역버스라 붐비는 시간대엔 버스기사가 직접 손님을 제지하는 식이다. 이날도 그랬다. 두 명의 일행이 타려고 하지만 좌석이 하나만 남아있을 경우 다음 차를 탈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 그래서 내가 탄 버스의 마지막 승객은 네 명의 모녀였다.


넷은 버스 통로를 한 번 쭉 걸어 뒷좌석으로 걸어갔고 이내 “다 따로따로 앉아야 하나 봐.”라는 소리와 함께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언니가 자기보다 두어 살 어린 동생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왔다.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휴대폰을 충전하고 있던 터라 선을 정리하고 자리를 비켜주려고 하던 찰나 언니가 말을 걸어왔다. “애기가 혹시 안쪽에 앉아도 되나요?” 그렇게 애기 친구는 내 옆좌석에 언니는 저 앞쪽 좌석에 나누어 앉게 되었다. 너무 어린 친구이기도 해서 언니랑 같이 앉을 수 있게 앞 좌석에 내가 가서 앉을까 고민하는 찰나 버스가 출발했고, 이대로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 푸르려던 안전벨트를 제자리에 돌려놨다.


버스가 굴다리를 지나고 자유로에 접어들기 전까지 애기 친구는 가방을 멘 채 야무지고도 작은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애기 친구에게 안전벨트를 매자고 말해주고 싶은데, 낯선 사람과 말을 섞는 데 거부감이 있으려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비포장 도로를 지나던 버스가 크게 덜컹거렸고 작은 체구는 의자 앞쪽으로 한 움큼씩 옮겨지고 있었다. 덜컹거림에 놀란 아이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이때다 싶어 “혹시 벨트 맬래요?” 물었다. 애기 친구는 이렇다 할 대답 대신 내 배 언저리의 벨트를 한 번 훑었고 다시 자신의 벨트 위치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가방을 벗어서 제 앞에 걸어놓을게요” 하였더니 본인 자리 앞엔 가방 걸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순순히 가방을 내어준다. 나는 절대 이 가방을 탐내지 않으리란 걸 온몸으로 표현하며 가방 걸이에 가방을 걸고 애기 친구가 벨트 매는 걸 도와준 뒤 다시 옆자리 승객 모드로 돌아갔다.


자유로에 접어들고 햇살이 차창으로 넘어와 책장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생길 무렵 애기 친구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어깨, 보다 훨씬 아래인 팔 언저리에 작은 머리를 기대기 시작했는데 그 작은 무게가 나를 꿈쩍도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기대 왔을 때 이렇게 가벼운 무게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음과 동시에 이 작은 무게가 온전히 제자리를 차지하고 머물 수 있도록 나는 몸을 움직이지 않아야 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감으로 치면 또 제법 무거운 것. 그 양가적인 무게를 이리저리 만끽하며 나는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했더랬다.


애기 친구의 머리는 수차례 앞으로 떨궈졌다. 그때마다 조금씩 팔과 의자 사이에 간격을 두어 안정적으로 머리를 기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보았지만 광역버스의 빛과 같은 주행 속도는 자꾸만 아이의 머리를 떨궈냈다.


이 작은 머리 하나가 내게 기대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뒤라스가 무슨 대수이며 (‘뒤라스의 말’이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엔 전혀 집중하지 못한 채 오로지 애기 친구가 잠에서 깨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집중하게 되었고, 잠깐 기대어 자는 작은 생명체에게도 이렇게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는데 나에게 훗날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나의 인생을 온전히 내어주겠구나,라는 달콤한 상상도 잠깐은 해보았던. 꼭 쥔 작은 두 손도, 바닥과는 한참 떨어진 두 발도, 너무나 작았던 체구도, 작은 존재가 곁에 있다는 건 이토록 신중하고 조심하는 어른을 만들어준다는 걸 새삼 체감했다.


정작 애기 친구에겐 처음은 조금 낯선 허나 이내 별 생각 않고 꾸벅꾸벅 졸다 목적지에 도착한 기억에도 남지 않을 찰나의 버스기행이었겠지만, 어른에겐 촌각에 스며드는 잡생각들로 가득했던 오래 남을 여정. 대상이 애기 친구이다 보니 사진을 몰래 찍을 수도 없었기에, 조금씩 곱씹다 글로나마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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