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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Feb 17. 2024

12시간의 단수

갑작스러운 단수가 발생했다. 생활수로 지하수를 끌어 쓰다 보면 왕왕 있는 이벤트지만, 금요일 밤 열한 시 반에 찾아오는 단수는 달갑지 않다. 편의점은 걸어서 20분 거리. 하필 오늘은 가족 중 한 명이 차를 가지고 지방에 간 날이다.


일단 원고 작업하며 수없이 들이켜야 할 따뜻한 차를 포기해야 한다. 미리 받아놓은 정수도 없다 보니 마실 물도 없다. 입욕은커녕 세수할 물도 없다. 양치를 마치자마자 물이 뚝 끊긴 엄마와는 달리 난 한창 알사탕을 물고 있던 시각이라 내 양치는 운 좋게 미리 받아둔 포트 물로 해결했다.


세면대 물 틀어놓고 좔좔 흘러내려오는 물줄기에 이따금씩 손을 갖다 대어 얼굴을 씻고, 입 안을 헹구던 일이 물을 낭비하는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물컵에 잔뜩 따라 부은 물로도 열 번은 헹굴 수 있는 것을. 반신욕 한답시고 매일 욕조 한가득 받았던 물은 또 얼마나 아까운지. 지금 같은 상황이면 한 달치 양치를 해결할 수 있는 양이다.


모터가 고장 난 것 같다며 내일 아침 일찍 찾아오겠다는 수리기사의 말을 끝으로 최소 열두 시간, 혹은 그 이상, 물 없이 지낼 시간을 상상해 봤다. 있다가 사라진 존재의 부재는 앞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부재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다. 동시에 평소라면 자정 넘어선 마시지도 않는 생수가 더 아른거리는가 하면 갈증을 느끼는 득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과 망상이 나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기어이 이런 현실을 마주해야만 물의 소중함을 깨닫는가 싶어 조금 스스로가 못마땅하기도 한 그런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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