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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y 13. 2024

비 오는 지하철의 잔상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기억 하나.


삼성역에 볼일이 생겨 지하철 2호선을 탄 날이었다. 젖은 우산이며 축축한 옷가지로 차내엔 꿉꿉한 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어쩌다 꾸역꾸역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한참 책을 읽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정차한 역이 당최 어딘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퇴근 시간, 만원 열차였다. 서있는 승객들 사이사이로 보일 듯 말듯한 차내 전광판은 애석하게도 고장이 나 먹통이었다. 습기로 뿌옇게 변한 창문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그 너머 구석구석을 눈으로 더듬었지만 정차역을 가늠할 힌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장 내리자니 어째 조금 늦은 감이 있고, 출입문까지 인파를 뚫을 자신또한 없었다. 


점점 사색이 되어가던 그때. 대각선 왼쪽에 서있던 정장 차림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그는 두리번거리던 나를 일찌감치 발견했고,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터였을 것이다. 진작부터 알려주고 싶었다는 듯 나와 눈이 마주치고 빙그레 웃더니만 고요하고도 정확한 입모양으로 '신-림'이라 전달해 주었으니 말이다.


아, 그때 나는 얼마나 안도했던가. 낯선 공간에서 멋모르고 받아버린 조용한 선의. 안도하는 나를 보며 그 또한 안도했을 것이다. 작은 목례로 감사함을 표했다. 짧아야 십몇 초, 길어야 삼십 초쯤 되는 일생의 찰나인 그 기억이 여섯 해가 지난 오늘날에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왜일지.


편하게 앉아서 책이나 읽던 나와는 달리 그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다른 한 손으론 백팩을 꼭 쥔 채 힘겹게 서있는 형편이었다. 자유롭지 못한 두 손과 달리 그의 마음만큼은 여유로웠던 것을. 그 넉넉함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엊그제, 선물할 꽃다발을 종이가방에 담고 지하철을 탔다. 비 오는 주말. 탈 사람도 내릴 사람도 많은 정차역을 지나칠 때마다 물기 젖은 누군가의 우산이 내 꽃다발을 스치는 건 아닐지, 나는 또 한참 예민해져 있었다. 그 순간 그가 보내왔던 선의가 떠올랐다.


한 번 건네받은 선의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그날 이후 낯선 타인과 그런 마음들을 주고받은 적이 없어서는 아닐지.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그제야 차내 승객들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왔다는 걸 그렇게 깨닫는다. 언젠가 또다시 비 오는 날 지하철을 타게 된다면 나에게도 그런 넉넉함이 찾아와 주길. 시선을 넉넉하게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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