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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지수 Apr 15. 2019

HYDE PARK, CHICAGO

그 낯선 곳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카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시카고 피자'나 영화 '시카고'를 떠올릴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예능 방송 <비정상회담>에 출연했던 타일러의 출신 대학이 '시카고 대학교'였다는 것 정도는 기억할지도 모른다. 일 년 전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화려한 신문물로 가득 찬 동부의 뉴욕 거리나 서부의 그랜드캐년 정도였을 뿐, 시카고라는 단어가 분명 무슨 상표나 사람 이름이 아닌 지명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래서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역사를 가진 곳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서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 있었다. 장장 10개월이 넘는 기간을 이 낯선 땅 시카고에서 살아야 한다니. 3년 전, 스물세 살 초반을 싱가포르에서 한 달 동안 머문 적은 있었으나 이번에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내 주전공인 역사학, 기록학과도 다른 영역인 대학교 도서관 사서 인턴으로 일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처음 재단 측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날아갈 듯 기뻤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감으로 변했고, 이 곳에 오기 전까지도 준비가 덜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정착 과정에 잠시나마 함께해 준 언니의 도움이 있었기에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적어도 2019년, 내 브런치 피드는 이 낯선 땅 시카고와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만 채워질 예정이다. 워낙 게으른 사람이라 시카고에 대한 유용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지난 25년을 한국에서만 살아왔던 평범한 20대 중반 여자 사람이 낯선 문화에 적응하는 모습과 순간의 감정들을 간접 체험하고 싶다면 가능하다.





오헤어 인터내셔널 공항에서 블루라인을 타고 시카고 다운타운에 위치한 잭슨 역에 내렸다. 일단 나가서 택시를 잡을 심정으로 제일 가까운 출구를 빠져나왔는데, 마침 시카고에서 유명하다는 공공건축물 <플라밍고>를 마주하여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노란 택시까지 지나간다.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노랑, 빨강, 파랑 원색이 한 컷에 모두 공존하는 사진, 이것이 내가 시카고에서 처음 찍은 사진이다. 어딘가 칙칙하고 삭막했던 지하철과는 달리 시카고의 도심은 한 겨울에도 색채가 뚜렷했다. 기쁜 마음도 잠시, 우버 택시를 기다리는 10분은 '윈디 시티'의 신고식을 치러주기라도 하는 듯 온 얼굴과 손등에 바람이 강하게 스쳐서, 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위치를 모르는 우버 택시 기사와 몇 차례 전화로 실랑이까지 벌였다. 13시간의 비행, 공항에서 도심까지로 이동하는 1시간의 지하철, 15시간의 시차, 추위와 배고픔, 이 모든 요소들에 녹초가 된 상태라 일단 목적지에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버를 타고 20여 분쯤 지났을까, 사진으로만 마주하던 하이드 파크를 실제로 보는 기분은 참 아리송했다. 여기가 앞으로 내가 살 동네라니. 시카고 남부 치안이 위험하다는 뉴스와 댓글들을 읽고 간 터라 긴장하고 있었지만, 택시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하이드 파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동네였다. 물론 밤에는 이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동네가 또 어떤 곳으로 변할지 모르고, 지금 안전하다고 느끼는 이 순간에도 하이드 파크를 기준으로 더 위험하다는 서쪽과 남쪽에는 어떤 범죄가 일어나고 있을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미리 예약해놓았던 에어비앤비에 도착해 짐을 풀고, 하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비행기에서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잠부터 해결해야 했다. 유럽여행 때 나름 시차에 빨리 적응했던 언니와 나는 한국을 기준으로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이동하는 루트에 조금 더 약한 건지 일주일 내내 시차에 시달렸다. 하루 일과로 시카고 대학교나, 다운타운의 유명한 관광 명소를 한 두 곳씩 둘러보고, 앞으로 살 집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고 옮기는 와중에 꼭 한 번은 에어비앤비 숙소로 돌아와 낮잠을 청해야만 했다. 그냥 졸린 정도가 아니라 이대로 돌아다니다가 길바닥에 갑자기 쓰러져 잠이 들 수도 있을 만큼 피곤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닌 둘이라 버스 안에서도 한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 나머지 한 사람은 목적지를 체크했고, 하루 1-2시간씩 낮잠 자는 시간을 억지로 늦춰보니 언니가 돌아갈 때쯤에는 어느 정도 시차에 적응이 된 상태였다.



눈 내린 하이드 파크의 풍경


시카고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아침, 첫 여정은 우선 앞으로 10개월 동안 일할 시카고 대학교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이 길들은 곧 10개월 동안 출퇴근하며 걸어 다닐 길이기 때문에 집으로부터 도서관까지 걸어서 대략 몇 분 정도 걸리는지 시간을 체크했다. 주말 오전의 하이드 파크는 블록마다 가끔 한 두 사람만 마주칠 정도로 한산했고, 도로의 차들은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는 많았다. 미국의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하이드 파크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이기 때문에 비교적 아파트나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편이다. 보통 아파트라고 해도 3층을 넘는 곳이 많지 않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층 아파트와 원룸이 유행이라고 한다. 특히 학생들은 늘 수업과 과제로 시달릴 텐데 큰 집보다는 관리하기 편한 작은 집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미국의 대학교 캠퍼스의 특징 중 하나는 한국과는 다르게 캠퍼스와 그 밖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2달 머무는 동안 아직 시카고 대학교, 노스웨스턴 대학교,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만 방문했을 뿐이지만 세 곳 모두 캠퍼스를 향해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시카고 대학교를 처음 둘러본 이 날도 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 앞에 시카고 대학교의 교색(校色)인 자주색 푯말을 본 뒤에야 이곳이 캠퍼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캠퍼스 밖과는 달리 햄버거를 입에 물고 뛰어다니는 학생들, 백팩을 메고 어느 곳인가로 향하는 학생들, 카페에서도 늘 한 명도 예외없이 책과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하는 학생들을 보니 이곳이 'Where Fun Goes to Die"라는 시카고 대학교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내가 앞으로 일할, 시카고 대학교의 중앙 도서관인 레겐스타인(Regenstien Library) 건물이다. 레겐스타인 건물은 생각보다 거대해서 최대한 실물과 비슷한 모습을 담으려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실패한다. 월터 네이치라는 건축가가 지은 이 거대한 고딕 양식의 건물은 건축사에서도 자주 회자된다고 한다. 내가 일하는 동아시아 컬렉션은 이 건물의 5층에 위치해 있으며, 동아시아학에 대한 북미 내 연구자들의 관심과 학문의 발전에 따라 1936년 처음 문을 열었다. 그중에서도 한국학 컬렉션은 중국학, 일본학에 이어 1988년 비교적 늦게 등장하였지만, 주제 전문 사서와 한국학 연구자들의 노고로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한국학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망라하면서도 특히 역사와 문학 분야에 중점을 둠으로써 연구자들의 수요에 부합하는 장서 개발을 도모하고 있다.


레겐스타인 바로 옆에 위치한 만수에토(Joe and Rika Mansueto Library)는 2011년 새로이 지어진 건물로, 최근 크게 급증한 시카고 대학교 도서관의 자료를 안전하고도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지하에 거대한 저장창고가 설치되어 있는 만수에토 도서관은 비교적 이용 횟수가 적은 자료를 보관하여 공간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1층에는 학생들과 연구자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지하에 보관된 자료들은 도서관 웹사이트를 통해 이용자의 클릭 한 번으로 자동화 시스템과 연결되어 대출도 가능하다. 시카고 대학교 도서관이야 말로 사서들의 전문지식과 기술, 연구자와 학생들의 활발한 연구 활동, 학교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공간이다.









아직 정리가 덜 된(이라고 말하고 싶은...) 내 방


짧지만 긴 6일간의 이사를 마치고 앞으로 살 집에 들어오니 룸메들이 남겨놓은 메모가 내 방문에 붙여져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날로부터 두 달이 훌쩍 넘은 지금은 낯설기만 하던 풍경들도 어느새 익숙해졌고, 초기 정착 과정에 필요한 서류 작업들도 해결되어 일상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언젠가 잠깐 쪽잠을 자려고 침대에 눕는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방의 구조와 분위기, 그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편안한 탓에 어느덧 이곳이 많이 익숙해졌구나- 싶었다. 여행자의 시선도 점차 사라지는 중이었지만 4월 이후로는 드디어 시카고에도 봄이 찾아왔고, 다시 이곳을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시카고는 한국을 제외하고 내가 처음으로 두 계절을 맞이하는 곳이 되었다. 봄, 여름, 가을의 시카고가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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