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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지수 Nov 24. 2019

시카고의 겨울






시카고에 첫눈이 내렸던 할로윈 데이에는 LA 여행 중이어서 첫눈을 놓쳤지만, 여행을 다녀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나 가득 눈이 쌓인 날이 있었다. 지금은 다 녹아버려서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미국은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칼퇴근이라 올 한 해는 널널할 줄 알았는데 10개월 동안 여행도 많이 다니고, 맡고 있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마감일이 몇 개월 앞당겨지고, 개인적으로 리서치 서포트하는 교수님 일도 생기는 등 정신없이 보냈다. 업무 외에도, 서울 자취 6년이라는 경력이 무색할 만큼 이곳에서는 어쩐지 일상생활이 더 바쁘게 느껴진다. 이마트 쓱배송 같은 서비스가 없어서인지 적어도 일주일에 1-2번씩은 장을 보러 나가야 하고, 집 안에 세탁기가 없고 공용 세탁/건조기를 사용해야 해서 늘 타이머를 맞춰놓고 빨래를 돌리고 건조로 옮겨놓고 걷어와야 한다. 청소하고 요리하고 집안일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이 지루한 일들도 나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제 인턴십 종료일까지 남은 날은 딱 3주. 언젠가 끝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미국에 도착한 지 몇 개월 안되었을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가다가, 여름이 지난 이후로는 시간에 가속도가 붙어서 갑자기 이 지점까지 와버린 것 같아 당황스럽다. 미국에 오기 전에 다짐했던 것만큼 많은 것을 얻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을 알고 작년으로 다시 돌아갔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하겠다. 이는 내가 어떤 큰 선택을 내린 후 일을 마무리하면서 한 번씩 평가해보는 방식이다. 세상을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여서 이제는 내 성장의 지표를 얼만큼 많은 것을 얻었느냐가 아닌, 얼만큼 내가 어떤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느냐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리고 활동적인 성격이 아닌 내가 아무 연고 없는 미국에 와서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내면서 느낀 것 하나. 나는 외로움에 강한 사람이다. 누군가 네 성격의 장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멘탈이 강하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겠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매우 길어져도 나는 시간을 꽤 효율적으로 잘 쓰는 것 같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감정이 내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감정 조절을 잘한다. 외로움이란 자꾸만 하나의 상태에, 감정에 멈춰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현대인이 외로운 이유는 고독을 잘 견디지 못해서라는 말과 반대로, 나는 고독을 잘 견딘다. 그러므로 외로움이 들어올 틈이 없다.



내 장점 또 하나, 체력. 어렸을 때부터 체력 하나는 좋았는데 그 추운 시카고에 와서도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잘 살고 있다! 건강에 대해서는 언제나 겸손해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내 건강 상태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진 않으니 만족스럽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도 학교에 아파서 빠졌던 적은 손에 꼽는 것 같다. 그보다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빠진 적이 많았고 (심지어 고등학교 때도..) 우리 멋진 엄마는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면서 쿨하게 학교에 아프다고 거짓말 쳐준 적도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까지 시켜줬으면 정말 멋진 엄마 아빠가 될 뻔했지만 아쉽게도 자퇴까지는 허용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요즘 동아시아도서관 직원들을 마주칠 때마다 덕담을 자주 듣고 있다. 잠시 다녀가는 인턴임에도 정말 같은 식구였던 것처럼 대해주셔서 늘 감사할 따름이다. 인턴십이 끝난 뒤에도 뉴욕, 워싱턴 D.C.를 여행할 예정이라 사실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는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지만, 떠나갈 때가 다가오니 나는 다시 이방인의 시선으로 시카고를 바라보고 있다. 주말에도 은근 할 일이 많아서 잠시 장 보러 나가는 것만 빼면 이틀 연속 집에만 있을 때도 많았는데, 남은 동안은 하루라도 더 나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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