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거 왜 하는 건데요?
대 비대면 시대와 대 알고리즘 시대를 맞이하야,
정보의 편향적 취득과 이에서 비롯되는 확증편향의 프레임에 본인을 가두는 것이 쉬운 시대가 되었더라.
사실 내가 느낀 '다양성의 탈락' 현상은 자의든 타의든 새로운 사람을 접하는 사회생활이 제한적이라거나 본인이 어떤 무리의 구성원 롤에 만족하게 되어 소위 <고인물>이 된다거나 뭐 살다보면 시기를 막론하고 올 법한 일이긴 할 터인데, 그러니까 뭐 '바이러스'라는 촉매가 나뿐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이 현상을 가속화한 것 아니겠나 싶다. 한편으론 꽤 대다수에게 필연적으로 다가 올 상실의 감각을 미리 과감하게 경험하게 해주어서, 그 극단적인 상황에 되려 지금은 감사하다 라는 생각마저 드는 지금이네요.
하여튼 나는 내가 꽤나 편협한 인간이라는 것을 순순히 나름 이르게 인식?인정?한 편이었다. 때로는 편협합에 기대어 취향이라는 것을 발전시켜 나갔던 적도 있었고, 때로는 본인의 편협함에 질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만 안다'류의 <신경험론자>가 되어 정처없이 시행착오를 겪기 위해 노력했던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갖게 된 처세술이자 심리적 방어기제의 최강 방패가 무엇이냐? 다름 아닌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마법의 주문이올시다.
나는 그런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내가 싫을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었다. 이해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이것저것 받아들인다고 노력하다 보니 때때로 강단있게 내려야 할 결정에는 정작 우유부단해지는 것 같기도 하거니와, 가끔은 내 내면의 포용성의 그릇이 와장창! 깨지기 일보직전까지 다양성의 포화를 경험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뭐, 그런 말이 있지 않나 '나를 파괴시키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어찌저찌 버텨낸 뒤 돌아보고 나면 오마이갓, 나란 인간의 멘탈이 단단해진 기분! 종의 다양성이 생태계 유지의 비법이라면, 상황에 대한 판단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관점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복잡다난한 현대사회를 제법 '잘' 살아내보고자 하는 현대인의 <생존비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비법을 신봉하는 내가 생존 키트를 잃고 말았다는 거지.
헉! 이 얘기를 하려면 왜 독서모임 운영을 시작했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지난한 이야기들을 축약해 보자면,
1. 독서가 일종의 고상한 취미로 여겨지는 분위기보다는, 사실 쉽고 재밌는 취미임을 자각하고자 했고
2. 매일 만나던 무리가 아닌, 처음 알게 된 타인들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보고 싶었고
3. 직업, 수입, 나이 이런 사회적 위치와는 잠시 거리를 두고, 책을 매개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겪는 현재를 대화 나누기를 원했기 때문
그런데 망할, 바이러스로 인해서 잘 운영되던 모임과 그리고 그 모임이 계기가 되어 탄생한 책방까지 별다른 대책도 없이 멈춰버리게 되었다. '책'이라는 걸 키워드로 모인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다양한 취향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주기적으로 인사이트를 깨워주었던 이 소중한 대화의 기회들을 타의에 의해 순식간에 박탈당하고 만 것이다.
모임 운영은 대략 1년 반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편협함이 깨지는 쾌감의 경험에 중독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바이러스 창궐을 핑계로 타인과의 만남을 꺼리고, 자꾸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즐겼던 내게 일종의 금단현상을 불러 일으켰으니까 말이다. 뭐랄까. 미국 월가에서 비롯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영화 <빅쇼트>는 마크 트웨인의 명언으로 시작한다.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이 문장을 곱씹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 당시의 시기는 취향과 관점에 대한 근거 있는 확신이 생겨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합리적 확신'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아이러니를 겪었더랬다.
인간은 결국 사회 속의 존재이기에, 내가 성심성의껏 직조해낸 내면과 누가 대중없이 슥 흘겨보았을지라도 타인이 바라보는 윤곽이 모여 자아가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난 자아의 반? 까진 아니더라도 뭐 한 49% 정도에 대해 유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솔직히 수치에 오바를 좀 더한 셈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래야 좀 더 계기 같은 것이 되므로.
여러가지 불가지한 상황으로 인해, 모임은 일단 시작 못하겠고 그렇다면 역시 인터뷰가 좋은 핑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궁여지책 이라는 말이 꼭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타인을 만나고 싶었고(그것이 결국 나의 윤곽을 만나는 일이므로), 그들은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어떤 현실 속에서, 어떤 문제를 겪고 있고, 그래서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 그래서 그건 어떻게 발전시킨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떤 화법으로 이야기하고, 어떤 이야기들을 타인에게 남기고 싶은지 궁금했다. 그래, 궁금함 투성이었다.
나의 동기가 어떤 공적 책임과 상관 없이 다분히 사적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과 대답이 너무 사적이라기엔 인터뷰를 정리하고 퍼블리싱 하는 보람이 덜할 것만 같아, 이름이라도 '다소 사적인' 이라고 붙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좋아하는 '책' 소개를 해달라고 해야지. 책을 안 읽는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래 꼭 책이어야 할까. 사연이 담긴 물건이면 결국에는 그게 사유를 전달할 훌륭한 매체이지 않을까. 그래 요즘 즐겨듣는 음악도 물어보면 나중에 플레이리스트 같은 걸 만들어도 재밌을 거야. 마지막엔 꼭 나에게 한마디 정도는 받아내야지. 대중 없이 피어오르는 이런 저런 생각들이 모여 결국 <다소 사적인 인터뷰>가 구상되었고, 그 기획이 으레 그래왔듯 바쁜 일상을 핑계로 연기처럼 사라질까봐 겁난 나는 어쩐 일로 성급히 시작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다소 사적인 인터뷰>의 질문 구성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간단한 자기소개
2. 소개하고 싶은 책 또는 물건과 소개하고 싶은 이유
3. 그 매체를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4. 간단한 추천사
5. 즐겨듣는 음악
6. 인터뷰이의 인터뷰를 듣고 자유 질문
7. 정인천에게 한마디
인터뷰이와 질문은 정해졌고, 인터뷰 대상이 필요했다. 역시 메가급 인플루언서를 섭외해야 하나? 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당연히 역량도 안 되었다. 어떠한 자본이나 기획, 전략에 의한 인플루언스보다 정말 나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를 미치는 내 주위 사람이면 꽤 훌륭한 인터뷰이가 아닐까? 아니, 이거야말로 나만이 기획할 수 있고, 나만이 실행할 수 있는 오리지널 콘텐츠의 길이 아닐까?* 혹자는 또 궁여지책의 연속이구만. 생각할 수 있다. 에이 뭐 그러면 또 어때? 라는 태도입니다만, 이 정도면. 지인의 이야기를 이렇게 성실히 기록해두고 나중에 같이 사탕처럼 추억을 꺼내 먹겠다는 게, 세상에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나 해가 될 만한 일은 자제할테니 말이죠.
그러니까! 제 친구들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앞으로 저의 브런치에 연재 할 <다소 사적인 인터뷰>를 읽어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많관부는 아니고요. 적관부. 적당한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런 생각을 강화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친 책이 있으니, 바로 츠즈키 쿄이치의 <권외편집자> 입니다. 아웃사이더 콘텐츠에 대한 진정성과 콘텐츠 기획에 있어 귀감이 될 만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