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는 길>, 박서연 글/그림, 딸기책방
아이는 길을 걸었어. 작은 꽃들도 지났어.
"안녕, 나무늘보! 난 어른이 되는 길을 가고 있어."
"왜 어른이 되고 싶어?"
"아직은 잘 모르겠어."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본인이 왜 태어났는지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열심히 먹고 열심히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길'에 선다. 그게 인간의 운명이다. 박서연 작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어른이 되는 길> 역시 아무런 배경설명 없이 아이가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는 길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저마다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왜 어른이 되고 싶어?"
"어른이 되면 뭐가 좋은데?"
찐 으른으로서 대답을 해줘야 할 것만 같아 마음속으로 멋진 문장을 고르는데 문득 '내가 정말 어른인가?, '난 어른이 됐나?'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거다. 어릴 땐 '이게 바로 어른이지!' 하는 명확한 상이 있었던 것 같다. 주변 어른들과 나를 견줘보며 만든 '어른의 자격' 목록도 있었다.
어른의 자격
엄마만큼 키가 커야 한다.
엄마를 위로해 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크기가 커야 한다.
혼자 라면 하나를 다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엄마를 속일 수 있을 정도로 거짓말에 능숙해야 한다.
실수해도 곧바로 마음의 평점심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고백을 거절당하고 울어 봐야 한다.
거절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혼자 해결해야 한다. (뿌엥- 울면서 바로 엄마를 찾으면 안 됨)
혼자 여행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사서 스타일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활동을 해서 나 자신과 가족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 앞에서 떨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에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청소, 빨래 등의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삶을 계획하고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한참 적다 보니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만 해도 집주인에게 집이 물이 샌다는 말을 못 해서 밤 잠을 설쳤다. 엄마보다 키는 컸는데 마음은 쪼잔하기 그지없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 앞에선 식식거릴 뿐이다. 꼭 지나고 나야 할 말이 생각난다. 분해서 울기도 잘 운다. 혼자 여행을 가 본 적도 없고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심장이 두근 거린다. 낼모레면 마흔인데... 난 언제 어른이 될까?
어른의 자격 목록을 보니 온통 '해야 한다' 뿐이다. 의무감뿐인 게 어른이라면 평생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왜 태어났는지 왜 어른이 돼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되는 길에 들어섰다면, 반대로 아무 이유도 없이 쉬거나 멈춰서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난 좀 쉬고 싶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채로, 길에서 만난 수많은 '아무 안 된' 이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