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미술관>,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서애경 옮김, 웅진주니어
<행복한 미술관>은 앤서니 브라운이 화가의 꿈을 갖게 된 미술관 나들이를 보여주는 책이다. 앞장선 엄마와는 달리 조지 형과, 나, 아빠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으리으리해 보이는 미술관 앞에서 주눅이 든 형은 그림 옆에 서 있지 말라는 관리인의 말에 한층 더 침울해진다. 아빠는 형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계속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는데 조지 형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다.
그때 한 가족이 그려진 그림 앞에서 엄마가 "이거 보니까 우리가 아는 누구네 집 생각나지 않니?"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엄마는 그림 속의 아버지가, 다른 남자가 자기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쥐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치 어느 날이 생각난다는 듯 그림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는데... 깨알 같은 글씨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미술관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마치 주인공의 가족이 된 듯 나들이에 동참하다 보면 그림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 아이와 미술관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지 알 수 있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와 머리가 희끗한 노 작가의 시간여행에 동참해 본다. 어렸을 때 뭐가 될지 몰랐다는 앤서니 브라운, 자신이 뭐가 될지 결정된 바로 그날을 떠올리며 과거를 회상하는데... 내가 뭐가 될지 결정된 날은 언제였을까?
어렸을 때, 나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승부욕은 사춘기의 변형된 발현이었고 생존 그 자체이기도 했다. 달아나고 싶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으로 무엇이든 아주 열심히 했다. 열심히 하면 뭐가 됐든 어느 정도는 잘하게 된다. 그런데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미술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그림 그리는 법을 제대로 알려준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이젤을 펴 놓고 석고상을 그리는 모습을 동경했지만 그런 마음을 가질수록 열등감은 더 심해졌다. 하얀 도화지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던 사생대회가 떠오른다. 어떻게 그려야 하나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상황을 모면하나 걱정하며 애꿎은 도화지만 한참을 쳐다봤다. 미술학원 다녔던 친구들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흉내 내다, 노는 게 더 좋다며 뛰어놀았던 슬픈 뒷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뭐가 될지 결정된 날은 바로 그날이었을까?
고등학교 때 교정에서 풍경화 그리기 할 때였다. ‘갈색’이라고 쓰여 있는 물감을 덜어내 나무를 칠하니까 염화백이라 불렸던 선생님이,
"야, 눈깔을 똑바로 뜨고 봐봐. 네 눈엔 나무가 이 색으로 보이냐? 거의 검은색으로 보이잖아. 근데 왜 그 색을 칠하고 있어?"
'아... 나무 기둥은 갈색, 나뭇잎은 초록색으로 칠하는 게 아니었구나.'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게 배우지 못한 탓인지 사물을 그대로 보지 못한 탓인지 알 수 없던 그날이었을까?
방학 때 심심해서 미술 교과서를 읽었는데, 거기에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이 있었다. 아주 작은 사진이었는데, 너무 강렬해서 잊히지가 않았다. 달아나지 않고 소리치지 않아도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그림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 놓으니까 너무 바르게만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돌덩이처럼 무거웠던 짐이 구름처럼 가벼워지고 높은 하늘 위에서 순도 100%의 산소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느낌이었다. 아, 그럼 그날이었던가?
내가 무엇이 될지 결정된 건 어느 날이었을까? 그림 그리는 것에 열등감을 가졌던 때? 예술이 주는 찬란한 감동을 느꼈던 때? 그것을 해체하고 잘근잘근 씹어 모두 다 내 것으로 흡수하고 싶었던 … 그때?
그림책을 보자마자 ‘이거다!’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신의 계시 같았던 순간이 알고 보니 그날들의 '모음'이자 오랫동안 숨죽여 기다려왔던 시간들의 ‘마침내’였다. 점처럼 찍힌 현재의 순간들이 선으로 이어져 미래가 된다고 했던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과거의 나는 지금을 위해 벅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림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유로운 해석이 주는 즐거움, 그것을 나눌 사람들이 있는 지금, 그림책 첫 장면에 나온 노작가의 여유와 만족을 느낀다. 어떤 일이든 계속하다 보면 무엇이든 되기 마련이다. 나는 또 무엇이 되기 위해 오늘의 점을 찍는다. 열등감과 실패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글을 잘 쓰기 위한 100일간의 챌린지
'그림책에서 첫 문장을 빌려오다'
오늘은 [행복한 미술관]의 "내가 뭐가 될지 결정된 것은 바로 그날이었어요"란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