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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Feb 23. 2023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씩씩한 마들린느>, 루드비히 베멀먼즈 글/그림, 시공주니어

<씩씩한 마들린느>는 표지만 봐도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그림에도 유행이 있는 건지 보자마자 80년대가 떠올랐다. 어릴 때 키웠던 노란 잉꼬새소리, 엄마가 해 준 빵냄새, 포근한 엄마품속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때 읽었다면 '이게 뭐야'하며 웃고는 다시는 집어 들지 않았겠지. 내용은 별다른 게 없다. 



열두 꼬마들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서 가장 작은 아이 마들린느가 맹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다. 아이들은 마들린느가 있는 병실을 방문하고, 이어 장난감, 사탕, 인형의 집까지 있는 병실에 탄성 한다. 그중 아이들이 가장 놀란 것은 마들린느의 배에 있는 수술 자국. 마들린느를 만나고 돌아온 그날 밤, 한밤중에 기숙사 아이들은 일제히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친다. 자기들도 마들린느처럼 맹장 수술받게 해 달라고. 클라벨 선생님은 “여러분이 건강하다는 걸 하느님께 감사드리세요!”라고 달래고, 아이들은 모두 평안히 잠이 든다.


맹장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울다니... 아이다운 발상이다. 나도 어릴 땐 어찌나 아프고 싶었던지! 엄마에게 말했다가는 등짝을 맞기 일쑤였다. 어른이 된 지금은 아프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 꿈도 꾸기 싫다. 지금 내 입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져 읽고 또 읽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게 제자리에서 익숙한 방식대로 흘러가는 게 평안이라 느껴지다니. 가까운 나의 과거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오늘 하루의 기록, 누군가 읽으면 '이게 뭐야?' 할 법한 일상의 나열에 '행복'이란 제목을 붙이고 싶다. 



행복


아침에 알람이 여러 번 울리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나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다. 그래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하니 책임감에 눈을 떴다.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이의 이마에 뽀뽀를 하고 볼을 쓰다듬으니 이마를 찡그리며 뒤척였다. 잠에서 깬 듯하여 "우리 아들, 일어나자. 유치원 가야지." 하니 금세 눈을 뜨고 애착 인형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이고 옷을 단단히 입혀 등원을 마쳤다.


'아는 형님' 재방송을 보면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이틀 후에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강의가 있어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 곳에서 하는 오프라인 수업이라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했다. 하루 종일 자료를 찾고 되도록 쉽게 전달할 수 있도록 피피티를 만들었다. 베이글에 크림치즈와 블루베리 잼을 발라 점심을 해결하고 잠깐 베란다에 나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많이 부네.’ 하고 생각했다.


빨래도 개야 하고 이불 커버도 씌워야 하고 정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다시 책상에 앉았다. 조금 뒤 아이가 왔고 간단하게 간식을 먹인 뒤 다시 일, 저녁은 시켜 먹고 다시 일, 그러면서 아이 공부도 좀 봐주고 레고놀이도 하고 짧은 대화도 나눴다. 


어느덧 가족들이 모두 잠이 들었다. 거실엔 장난감과 인형이 나뒹굴고 샤워하느라 벗어 놓은 아이의 내복과 발수건이 한 몸처럼 붙어있지만, 문득 고요하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가족이 있어 마음 졸일 일도 없고

아픈 가족이 있어 무기력하게 곁을 지킬 일도 없고

자기만 아는 이의 넋두리를 들을 일도 없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잔소리도 없고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도 없고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도 없고…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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