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 아네테 멜레세 지음, 김서정 옮김, 미래아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거리에 신문, 잡지, 복권 따위를 파는 키오스크가 있다. 그 안엔 키오스크가 일터이자 삶 그 자체인 올가라는 여성이 산다. 그녀는 결코 키오스크를 떠나지 않는다. 손님이 없을 때도 키오스크에 누워 여행 잡지를 읽는 게 다다. 맘 속으로는 두 눈으로 직접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바다를 볼 수 있길 바라지만.
어느 날 올가의 삶을 바꿔줄 일생일대의 사건이 발생했다.우연히, 불행이란 이름으로!
평소 보다 멀리 놓여있는 신문 뭉치를 끌고 오느라 안간힘을 쓰는 사이 남자 아이 둘이 키오스크의 과자를 훔치려 했다. 올가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안 돼!”
순간 키오스크는 올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올가의 삶이자 전부인 키오스크가! 한참을 버둥대던 올가는 얼떨결에 벌떡 일어서게 된다. 그녀는 그제서야 스스로의 힘으로 키오스크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올가의 입에서 나온 “안 돼!”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부정을 저지르는 아이들을 향해 있지만 그동안의 삶에 던지는 경고이자 선언으로 들리기도 한다.
‘현실에 안주한 삶은 이제 그만! 이상하리만치 안 좋은 일이 계속된다면, 그건 기회야. 네 삶을 바꿀 기회.’
변화와 발전은 결국 지난 삶을 부정함으로써 온다. 나 스스로 ‘안 돼!’ 외치지 않으면 외부로부터 그 말을 하도록 나를 몰아세우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일을 불행, 사고, 문제, 이변 등으로 부른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날, 날씨도 좋고 화장도 잘 먹고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했던 날이었다. 그때 예기치 않게 전화가 걸려왔다. 우연히, 불행이란 이름으로.
언제나 내 발목을 잡던 동생의 문제였다. 내가 행복한 꼴을 못 보는 피붙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굴레가 또 내게 발작을 일으켰다. 보통은 30분 정도 시달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지곤 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낮에 시작된 공황발작이 밤을 지나가고 있었다. <키오스크>의 올가는 혼자 일어날 수 있었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과 약의 도움을 받아 일어났고, 그제서야, ‘안 돼!’ 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올가처럼 외부에서 벌어진 평소와 다른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 불행으로 나는 스스로 내 삶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단 한번도 키오스크 주변을 둘러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올가가 신이 나서 산책에 나서고 또 다른 난관을 만나 흘러 흘러 바닷가에 다다른 것처럼, 나도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결정을 하고, 절대 안돼 했던 내 신념을 번복하여 지금 제주에 와 있다. 늘 ‘집이 아닌 곳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했는데, 꿈꾸던 대로 파란 바다를 한 없이 바라 볼 수 있게 됐다. 언제 또 올지 모른다며 사진부터 찍고 다음 일정을 위해 후다닥 자리를 옮기는 게 아니라, 내일도 오고 그 다음날도 올 수 있으니 차분히 앉아서… 귀찮다는 듯 바다를 보았다. 바다를 보면서 ‘무엇을 써야 하지?’ ‘여기서 어떤 영감을 받아야 하나.’ 하는 강박을 내려놓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멍하니 그저 바라 보았다. 일렁일렁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파랑을 보고 저 멀리 떠 있는 배를 보고 바다랑 맞닿은 하늘을 보고 그 곳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지금 내 기분이 좋은지 되묻지 않고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하나 찾지 않았다. 명명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게 인생이려니… 파도가 왜 밀려오는지 모르지만 계속 밀려 드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고. 파도는 거기에 나는 여기에 그저 있으면 된다고 말이다.
오름에 올라가 신나게 뛰어내려와야겠다. 비가 오면 비자림 숲에 가서 흙 냄새를 맡아야지. 지역 식재료를 사다가 맛있는 음식을 해 먹고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책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의 삶과 만나봐야겠다. 하고 싶은 일이 하나 둘 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