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사라지기 전에>, 박혜미, 오후의 소묘
제주 협재 해변에서 서퍼들을 만났다. 까만색 전신 수영복을 입고, 타투를 하고,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딴, 얼굴이 구릿빛으로 물든, 당당한 걸음걸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생기가, 먼발치에서도 느껴졌다. 서핑보드를 들고 바다를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일상적이면서도 설레고 진지하면서도 가벼워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바다로 향하게 하는가? 밀려오고 물러서고 또다시 밀려오는 파도 위를, 넘어지고 곤두박질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실패 끝에 마침내 성공한 자신이 멋져 보여서? 자연을 정복했다는 비장한 만족감? 아니면... 그네 타듯 바람을 가르는 기분 좋은 시원함을 느끼기 위해서? 단순히 재밌어서일까?
어차피 내려오기 위해 오르는 등산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서핑 또한 관심도 없고 부럽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눈빛을 보니 처음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서핑의 매력이 뭘까? 무엇이 저들을 반짝이게 하는가?
박혜미 작가의 <빛이 사라지기 전에>는 노란 보드 하나를 들고 망망대해로 향하는 서퍼의 이야기를 담았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파도에 올라타 한 줌 물결을 쥐고 버리며 빛 사이사이를 통과하는 짜릿함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한 줌 물결을 쥐는 서퍼의 용기에 빗대어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삶에서 중요한 건 한 줌의 용기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서핑을 배워야겠다. 그럼 살아가는 일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부서져야 아름다운 윤슬, 넘어져야 일어설 수 있는 모순이 파란 파도와 함께 마음속에서 일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