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토너>를 읽고
도서관 구석에 꽂힌 오래된 책 같은 사람. 해도 들지 않는 서가에서 찾는 이 없이 조용히 풍화되고 있는 스토너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쁨과 환희, 두려움과 분노.. 심지어 연민조차 느껴지지 않는 마음 상태로 무엇을 말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든다. 일렁이는 마음은 없지만 분명 평안은 아닌, 비릿한 물을 마신 기분이다.
소설 <스토너>는 1891년 (미국) 미주리 주 중부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스토너가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운이 좋게도 대학 강단에 서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영문학을 연구했고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며 적당한 관계의 친구와 적당히 교류하고 삐뚤어진 동료의 미움을 큰 저항 없이 받았다. 한 번의 사랑이 있었으나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렸고 두 번의 전쟁을 겪고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책 초반에 나와있듯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평범한 삶이었고 그의 이름은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했다.
타인의 눈에 비친 삶과 이름 말고 그는 자신의 삶을 무엇이라 생각했을까. 그의 어머니처럼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 하다고 생각했을까. 내 생각에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생각도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간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자신에 대해 '질문' 하지 않는다. '나는 왜 이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개인적인 질문도, 전쟁 상황 속에서 지식인으로서 본인이 읽고 연구하고 알고 있는 바와 사회가 대치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 속에서 아내가 온몸으로 질문을 해 와도 묵묵부답이고 본인이 애정과 연민을 갖고 대했던 딸아이의 눈물 젖은 눈빛도 외면한다. 스스로에게도 묻지 않고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타인과 사회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스토너는 생애 마지막에 가서야 못다 한 질문을 토해낸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생애 마지막에 가서야 스스로에게 질문을 건넸던 스토너는 그것에 대한 대답인양 평생 몰두했던 학문의 결실인 책 한 권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준 건 아내도 딸도 친구도 아니었다.
주어진 삶을 살아냈지만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스토너가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왜 그를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할까. 죽음 이후에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사회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한 인물들은 지폐에 얼굴을 새기고 책을 짓고 생활했던 공간과 물건을 전시함으로써 길이 남는다. 위대한 가치에 목숨을 건 이들도 그렇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도 그렇다.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큰 영향을 준 인물, 넘치는 사랑을 주었다던가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던가 하는 이들도 타인의 기억 속에 오래 자리 잡는다. 그들의 공통점은 뭘까. 전 생애에 걸쳐 지키고자 했던 무엇이 있었다는 점 아닐까.
스스로 세운 가치를 지키고 살아가는 일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스스로의 행동에 확신을 부여하고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다.
확실히 구별되고 확신 있는 삶이 타인에게 선명하게 기억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있으면 너무 눈부셔서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스토너는 삶에서 '침묵과 책임'을 지키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딸과 아내를 버리고 도망가는 선택을 한 건 아니니, 소음 많은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가 더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의 굽은 등과 주름의 깊이를 다 이해할 수는 없기에 연민의 시선만큼은 거두지 않기로 한다. 그의 삶에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소네트를 되뇌어 본다.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