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연결 속에 살며, 이야기는 중력처럼 우리를 감싼다
2년 전 여름은 이상했다. 시간을 느끼는 감각이 너무나 달라서, 어떤 기억은 아주 빠르게 되감기를 한 것 같고 어떤 순간은 그 장면에 그대로 멈춰있다. 또 어떤 기억은 시간도, 공간도 너무 뜨겁게 압축 되어서 유기적인 모양으로 녹아내린 유리 그 자체 같다.
22년 6월 말에 닷페이스와 안녕을 고하는 전시를 마무리했고 녹초가 되었다. 상실은 나를 뚫고 가는 감정이었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인생의 새로운 구간에 들어섰다. 다양한 부정적 감정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또다른 일상 속에서 새로운 감정과 느낌이 만들어졌다. 꽉 잠겨있던 연결에서 해제된 사람처럼 나는 부유하며 낯선 감각을 느꼈다.
어느 주말에는 복합 쇼핑몰에 갔다. 눈부신 디스플레이 조명들과 새 물건들. 여기저기 붙은 프로모션 태그와 잘 정리된 브랜드 로고들. 분주하게 걷는 사람들을 하향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멍하니 바라봤다. 처음 만난 세상처럼 모든 게 낯설고 이물감이 들었다. 세상과 연결된 속도가, 방향이, 압력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귀 속에 있는 평형기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문제는 없었다.
그냥 나는 세상이 너무 평화롭게 표백된 것 같아 어지러웠던 것 같다. 오랫동안 붉은 빛을 보면 눈이 붉음에 적응하듯이 나는 문제가 있는 세상에 적응해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경계 모드를 갖추고 있으려 했던 시간에서 나는 조금씩 멀어져 보는 중이었다.
신형철 선생님이 언론은 사회의 감각기관이라는 말을 했다. 감각기관의 일부로 사는 삶은 어떨까. 어느 직업이든 각자가 맡은 일의 이상함이 있고, 그 이상함이 그 직업의 고유함이다. 직업인이 된다는 건 그 환경이 이상하고 고유한 형태로 자신을 변형하는 데 일부 동의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감각기관의 일부가 되어 예민한 사람이 되는 데 동의했다. 많은 순간 ‘지금의 문제'를 감각하고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보기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욕망을 읽어내는 훈련을 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하는지 고민했고 그 안에서 때로 팽팽하게 갈등하는 여러 가치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어느 한쪽을 쉽게 놓아버리지 않고 긴장 그 자체를 잘 조절하는 걸 목적으로 직업인으로서 애썼다. 그리고 그 여름엔 이제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감각을 꺼놓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더이상 언론 일을 하고 있지 않았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과한 중력에서 풀려나면 딛고 있던 발밑의 땅으로부터 밀려나며 중심을 잃는다. 나는 꽤 오래 과열된 상태로 일했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상담을 받으면서 하루는 분노하며 울고 하루는 자책하며 울었다.
"선생님. 세상에 너무 개새끼가 많아요. 선생님,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저는 역부족이에요."
그런 나는 매체를 하면서 마음을 다치는 사람이기도 했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환멸감과 자책하는 감정이 가장 다루기 어려운 과제였다. 이 두 감정이 나를 좀 변형시켰다고도 느낀다.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에는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했고, 사랑으로 일하려 했지만 내 어딘가에 부정적 감정의 속더께가 끼어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일을 할 때, 이중적인 욕망들이 부딪치면서 다각형으로 스스로가 깎여나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상적인 하나의 면만 가질 수 없고, 늘 현실에 충돌해보며 일하는 모양을 새롭게 만들어갔다. 이야기를 팬시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한쪽에 있었고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이 소외되거나 대상화되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가 한쪽에 있었다. 그 둘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하고 싶었다.
때로 실패했고,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위험에 처하게 했다. 그럴 때면 우리가 하는 일의 무게를 뼈저리게 느끼고 두렵기도 했다. 즐겁고 흥분되는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그 무서운 무게감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즐겁지도 않았을 것이다. 잘 해내야 한다는 소명과 잘 해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원하는 지점에 다다를 때 느끼는 희열이 있었다. 잘 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계 앞에 멈추었는가는 뒤에 이어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갈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한 번은 완전히 이전의 시간과 단절되는 경험이 스스로에게 필요하다고 느꼈다.
여행은 단절의 수단이었다. 모르는 언어와 풍경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알던 세계와 잠시 이별하는 시간. 결국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올 걸 알더라도, 지금 있는 곳을 떠나서 해독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이 여름에 나는 주로 여행지의 집에서 일주일 이상을 머물며 짧은 이주에 가까운 여행을 했다. 마침 유럽에 사는 친구를 보러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여행에 합류했다.
별 계획 없이 도시와 숙소만 정하고 공항 가는 날이 닥쳐서야 여정을 준비했다. 설레서 떠나는 여행도 아니고, 신나는 마음으로도 아니고, 유령 같은 아무개로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고 싶은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전히 이른 새벽에 자주 잠이 깼다. 상실감은 치워버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아파도 꼭 안고 견디는 쪽을 택했다. 한국의 소란함으로부터 좀 멀어져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일부러 소식들을 끊었고 마음 속 비행기 모드를 켜고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은 새로운 자극으로 여행자의 주의를 돌린다. 있는 돈을 털어 여행을 떠났고, 나는 많은 걸 하얗게 잊었다.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로 부서졌다. 바르셀로나의 여름 날씨가 화창했다. 10년 전 처음 스페인을 여행할 때는 우박이 내렸다. 그 여름엔 태양이 얼굴을 만끽하며 부지런히 바다와 수영장을 찾았다. 누드비치에 사람들이 깨벗고 몸을 태우고 있었다.
해가 늦게 지는 도시에서, 완전한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골목골목을 여행자로서 걸었다. 지역에서 생산했다는 맥주가 맛있었고, 목구멍을 열고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완벽한 계획 도시라는 바르셀로나의 밤풍경이 궁금해서, 야경 명소인 벙커를 찾아갔다.깨진 성벽 위에 걸터 앉은 사람들의 그림자. 밤공기에 마리화나 냄새가 퍼졌다. 주광색 가로등이 규범인, 정확히 네모꼴로 설계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벙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대조되는 정돈된 풍경이었다.
여름이었기 때문일까. 여행 내내 나는 감각을, 몸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이전 몇년 간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 되어 일종의 사회적 감각 기관으로 일한다는 목적에 빠져있었으나 몸이 있는 존재로서의 현실 감각에선 멀어져 있었다. 피드를 보고, 댓글을 보고, 데이터를 보고, 숫자로 환산되는 연결감을 지표로 두고 살았었다. 삶의 생생함을 뒷전에 두었었다는 걸 여행에서 알았다.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서 몸을 태우고, 바다에 누웠다. 프랑스에선 빵을 물고 바다로 나가서 놀기만 했다. 동글동글한 돌멩이로 가득한 니스 바닷가를 깨끼발로 딛었다.
크레딧 카드와 바디 랭귀지만으로 가능한 사회 생활. 나는 과하게 활성화 되어 있는 사회와의 연결을 끄고 소비하는 인간으로, 몸을 움직이는 생물로서만 여행을 했다. 다음 목적지는 독일이었고, 여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도시였다. 베를린을 거쳐 뮌헨,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내 친구들은 모두 베를린이 좋다고 했고, 독일에 사는 한 친구는 베를린을 대하는 사람들의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더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는 어느 쪽일지 궁금하다며.
베를린은 그 당시 나에겐 여행하기 가장 괴로운 도시였다. 전봇대에 붙은 찌라시와 거리 한복판에 마련되어 있는 추모의 장소들. 다양한 정치적 메시지가 도시를 흐르고 있었고, 슈퍼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라이드 먼스를 지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캔음료에도 퀴어 프라이드를 의미하는 무지개 디자인이 래핑되어 있었다. 손으로 갈겨쓴 반전 메시지와 대사관 건물에 꽂힌 팔레스타인 지지의 깃발들. 예술가들의 도시답게 건축물도, 건물 위에 쓰인 타이포그라피도 그 자체의 목소리로 시끄러운 토론을 하고 있었다. 모두를 위해 ‘좋음'을 표준화하자는 목소리와 모두 같다면 절대 좋을 수가 없다는 외침이 다채로운 시각 언어로 도시 안에 펼쳐졌다. 첫날도 그 다음날도 잠을 설쳤다. 새벽 네시쯤 숙소의 하얀 침대 시트에 앉아 밖을 보고 있으려니 서서히 해가 밝았다. 베를린은 정치적 존재,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깨우고 감각하게 만드는 도시였다.
베를린 거리를 걷다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만났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잘못을 기억하며, 독일에서 만든 추모 공원이다. 자연스럽게 도시를 보행하다보면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곳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세월호 6주기 때 희생자 형제자매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사회가 어떻게 참사를 추모하는지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었고, 닷페이스 인터뷰에서 당시의 기록과 소회를 들었다. 영상 제작을 위해 416재단에 미팅을 하러 처음 단원구에 갔던 날의 기억도 떠올랐다. 그 앞에서 선거 유세를 하던 트럭이 세월호 사건을 모욕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외치고 있었다. 시민들의 일상 공간에 추모 공원을 건립하자는 계획은 심한 반대에 부딪혀 있었다. 추모가 안전한 일상을 흔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추모 자체를 두려워했다. 우리도 일상에서 거리를 걷다가 세월호 추모의 공간을 만날 수 있을까. 사회적인 슬픔을 감춰야 할 것으로 만들지 않는 미래를 바란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직접 와서 본 홀로코스트 공원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계단처럼 점층적으로 높아지는 콘크리트 벽이 세워져있고 그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법한 여백 공간이 길이 되어 있었다. 벽과 벽 사이에서 홀린 듯이 걷고 있자니 네다섯살쯤 된 아이 하나가 내 시야에 갑작스레 나타났다. 아이는 잠시 멈춰섰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내달음질쳐 달려갔다. 이 건물은 사람들을 하나로 줄지어 걷도록 강제하는 구조였다. 그곳에서 나는 어딘가로 이송되듯 걸을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자꾸 눈앞에서 사라졌다. 누군가를 정면으로 마주치면 진로가 막혀 당황스러웠고,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옆길로 걷게 됐다. 그렇게 걷다보면 길과 길 사이를 통과하는 다른 사람의 옆모습을 다시 마주쳤다. 자유가 제약된 공간에서 걷는 느낌이 생소했다. 그 길 위에서 우연인듯 마주치는 누군가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자유를 제약하는 구조의 길을 걸으면서 의지할 수 있는 건 결국 길을 돌아 자꾸 마주치게 되는 타인의 풍경이었다. 해맑게 뛰는 아이와, 무심한 노인의 얼굴과, 사진을 남기는 신난 젊은이와, 압도된 사람, 빨리 걷는 사람, 두리번 거리는 사람, 마주침에 멋쩍어 하는 사람. 수많은 얼굴의 풍경을 지나고 나니 조금씩 낮아진 콘크리트 벽을 지나 공원을 나오게 됐다. 추모는 무엇인가. 기억은 어떻게 공유되는가. 우리는 결국 걸어서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는 그 콘크리트 벽을 따라 헤매이며 목격한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을 생각했다. 우리는 수많은 얼굴의 기억을 갖고 산다. 그 마주침이 우리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 만든다.
미디어란 무엇인가. 미디어는 수많은 타인과의 마주침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나에겐 그런 의미가 있다. 베를린을 여행하며 들렀던 유대인 박물관에서 나는 벽면 가득 증언자로 서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세로로 세워진 모니터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아 뻣뻣하거나 긴장한 느낌이 역력했다. 전혀 모르는 언어로 속삭이듯 증언하는 그 영상 앞에서 오랜 시간 서서 떠나지 못했고, 나처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내가 기억하는 또 하나의 장면이 겹쳐졌다.
닷페이스의 마지막 전시 엔딩크레딧에서 지금까지 목소리를 들려준 사람들을 위한 전시 섹션이 있었다. 스크린은 삼면으로 펼쳐졌는데, 정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동시에 재생되고, 오른쪽 섹션에는 번갈아가며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조명 됐다. 바닥을 향한 빔프로젝터에서는 사람들의 말이 활자가 되어 박혔다. 그 말 위에 한참을 앉아 있었던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일의 의미를 그대로 담은 장면이었다.
여행은 끝났다. 뮌헨을 끝으로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의 끝이 집이라는 게 후련하고 안심이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공항철도를 탔다. 지하철 속 모니터에서 YTN 뉴스 클립 몇 개가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한국어로 떠드는 사람들의 익숙한 말소리가 들렸다. 그 여러 소음을 들으며 순식간에 연결의 스위치가 켜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연결 속에 살며, 이야기는 중력처럼 은은하게 우리를 감싼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연결되고, 끌어당겨지고, 우연처럼 자꾸 서로를 마주친다. 미디어는 그 중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도구다. 무엇이 소음이고 무엇이 서로에게 가닿아야 할 신호인지를 분별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나는 ‘우리가 정말 더 많이 연결되어야 하는 게 맞는지' 의심했다. 소음은 때로 폭력이 되고, 행복에 유용한 면이 없어보였다. 나는 우리가 더 적은 시간 온라인에서 연결 되고, 각자 진짜 삶에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고 고요하길 바란다. 소음을 만드는 일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나는 소음을 피해 떠난 여행에서 소음 속에 우리가 꼭 들어야 하는 신호가 있다는 것과 그 신호의 필요를 다시금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해온 일과 그 과정에서 그려진 시행착오의 무늬를 글로 남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라는 일에 대해 나름의 정리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처음한 건 아니다. 그때마다 번번이 ‘내가 뭘 아냐'하는 버튼이 눌려서 나를 막았다. 매체 환경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성과를 숫자로 셈해서 따지기엔 내가 일에서 경험한 정도가 인플루언서와 비할 바가 아니다. 사회 과학 서적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일의 기록에 가깝고, 잘 벼르고 정제된 이야기도 아닐 것 같다. 전문성이란 게 무엇인지 스스로 시원한 정의 없이, 그에 가깝게 포장되기 쉬운 글을 생산하는 게 옳은 일일까. 그런 고민도 있었다. 여러 검열이 있었으나 이번엔 스스로의 검열을 뚫고 써보고자 한다. 나 개인의 경험으로만 가져가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여로 가능해진, 공공 자산 같은 경험이라는 생각도 한다.
미디어 업계의 일을 하면서, 나는 나의 커리큘럼이 있었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알아차린 실패의 패턴도 있었다. 그 무늬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도 배움의 한 종류일 수 있다고 믿는다. 모른다는 것도 앎의 한 부분이고, 안다는 건 언제나 새롭게 알게 될 가능성을 남긴다. 그런 부족함까지 포함해 미디어란 일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증언자의 벽. 유대인 박물관.
닷페이스 마지막 전시 <엔딩크레딧 .credit> 중 두번째 섹션 전시. 전시를 보고 있는 엄마와 아들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사진.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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