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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하는 사람의 직업 윤리

화제성과 윤리 사이에서

by SUMMER


미디어 기획과 윤리 책임


매체 하는 사람의 직업 윤리란 무엇인가.


직업윤리란 전문적인 일의 영역에서 공유하는 행동 강령 (code of conduct)를 말한다. 나는 사회에서 인정 받는 전문성의 교육의 체계에 들어가거나, 업계가 쌓아온 그러한 기준을 전수 받은 경험이 없다. 스스로의 전문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협회나 직업인 연합, 노조에 소속 되거나 기자 교육의 형태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한국기자협회에 소속된 공식적인 기자는 아닌 상태로 기자 상도 받고 언론사에 강연도 하러 다니는 애매한 출신. 어느 산업이든 변화를 맞이할 때 등장하는 혼종, 별종 같은 부류였기에 불러주는 곳에 맞춰 이름과 설명은 언제든 바꾸었다. 유튜버라고도 하고, 미디어라고도, 스타트업이라고도, 독립 언론이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불렀건, 닷페이스를 어떻게 봤건 우리 매체에서는 이야기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윤리를 치열하게 고민해왔다고 자부한다.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 대학의 저널리즘 윤리 관련 수업에서 왜 언론인의 직업윤리가 이토록 어려운 문제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언론인이란 직업의 윤리적 딜레마는 대부분 회색지대(Gray area)에 있다.. 수많은 사회 문제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다룰까? 이것은 결국 판단의 문제다. 언론사 전체의 기조도 있지만, 결국 현장에서 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기대서 이야기의 틀이 만들어지고 정보도 수집된다. 아주 분명하게 선악이 나뉘는 판단이 아니고 또 개개인의 윤리적 감각과 직관되며, 효과성의 문제랑 함께 저울에 올라가는 경우가 더 많다.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가 More Sensational VS 충분히 도덕적인가 more moral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가 More Sensational
VS 충분히 도덕적인가 more moral



우리는 흔히 객관적 언론, 사실을 추구하는 언론을 언론의 이상향으로 말한다. 그런데 이 객관이나 사실이란 말이 감추고 있는 것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는 과하게 정파적인 우리 나라 주요 언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 객관적 언론을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주장을 들으면 그 주장이 좀 헐겁다고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언론이란 우리 사회의 상호 주관성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서로 함께 존재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각자 다른 세계를 살고 있으며,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각자의 주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공통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가?


이 상호주관성이란 개념을 생각할 때 내게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다.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다. 이 영화엔 매일 단순하고 반복적인 삶을 사는 화장실 청소부가 나온다. 영화는 그의 반복되는 하루와 삶의 반경,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사람들이 충분히 함께 그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여유를 두고 보여준다. 그를 찾아온 조카와 하루를 보내면서,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사실 모두 다른 세계를 살아 간다고.


이 세상은 서로 다른 삶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중 서로 연결된 세상도 있지.
- 영화 퍼펙트데이즈 중


그의 세계와 그를 바라보며 지나치가는 사람들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타자를 평면적인 존재로 치부하고 속단하기 쉽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하나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나의 하루와 너의 하루는 너무나 다르고, 우리의 출신,계급,지향,사회적 위치를 비롯한 많은 요소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여 함께 문화를 만들고, 사회’적’ 자원의 쓰임을 결정하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보이지 않는 규칙, 보이는 물질적 자원들을 건설하고 만들어 나간다. 이 모든 것의 기반은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 그럼으로써 형성하는 상호 주관성을 기반으로 한다.


각자의 세계에서 터져나온 목소리를 모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인식과 감정을 ‘짐작’하고, 그를 바탕으로 소통하고 동의와 비동의 사이의 스펙트럼에서 상호적 인식을 만들어간다. 그런 상호 주관성을 만들어가는 게 언론이 하는 일이 아닌가? 누구의 세계를 들여다볼 것인지. 우리가 서로를 인식하고 함께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사실과 해석은 무엇인지. 교육과 예술, 정치와 같은 활동들이 모두 일정 부분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언론의 경우, 특정 영역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의 커뮤니티를 만들어내며 좀 더 공적 의무를 띤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공적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때, 오히려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욕을 먹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극적 이야기의 윤리


텔레그램 내 성착취 - 이른바 ‘N번방’이라고 불렸던 사회적 사건은 본래 추적단 불꽃이 2019년 처음 보도했다. 이후 한겨레에서 심층 보도를 이어갔으나 반향이 크지 않았다. 이후 다음해 1월 SBS <궁금한 이야기 Y>와 20년 3월 국민일보에서 낸 보도가 국민적 관심을 키웠다. 특히 국민일보의 ‘텔레그램에 강간 노예들이 있다’라는 제목을 단 이 보도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일주일 만에 용의자 신상공개에 250만명이 동의했고, 가입자 전원 신상공개 청원에도 180만명이 동의했다. 국민일보는 추적단 불꽃과 함께 6개월 간 텔레그램 방에 잠입해 취재했다. 기사에는 독자가 이 범죄의 잔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최소한도로 표현’했다는 말이 덧붙어있었다. 기사 안에는 채팅방 캡쳐본들이 올라와있었고 사진 속 인물들을 알아보기 힘들도록 흐릿하게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피해자)을 구해주고 싶다는 간절함이 컸다”
"계속 논의하며 얻은 결론은 100분의 1의 강도라도 범죄의 잔혹함과 교활함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거였어요.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기를 누구 보다 바랐거든요. 다만 표현이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라는 비판은 충분히 알고 계속 고민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출처: 한국기자협회(https://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47444)


국민일보의 이 기사는 공익에 기여했다고 봐야 할까? 이 기사를 언론의 직업 윤리라는 관점에서 평가해볼 수 있을까? 나는 기사를 보고, 이 기사가 흥하여 사회적 변화의 불을 지폈다는 사실에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과 아쉬움을 느꼈다. 단순히 범죄의 잔혹성을 담았기 때문이 아니었고, ‘그곳에 갓갓의 노예들이 있었다’거나 ‘n번방 창시자’라거나 ‘방마다 노예는 3~4명’, ‘아이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과정’과 같은 어구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불쾌감이 일었다. 기사의 효과성, 반향을 떠나서 범죄의 피해자를 기사 안에서 노예라고 지칭한 점, 노예로 ‘전락’했다거나 범죄가 일어나는 방을 만든 가해자를 ‘방을 창시’했다고 단어를 씀으로서 권력 대비를 통한 극적 효과를 노린 점이 느껴졌다. 그 뉘앙스가 만들어낸 극적 효과가 이 범죄를 드라마처럼 느끼게 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렸을 수 있겠다는 짐작을 한다.


아마 취재진은 취재 과정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격을 받고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걸 잘 전하고 싶었을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현실의 이야기는 때로 허구보다 더 극적이다. 나는 극화 자체를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느 정도의 보정은 오히려 현실감을 생생하게 살리는 방법이다. 다큐멘터리와 극, 이야기의 힘을 창작자가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닷페이스도 그런 시도를 많이 했다. 사명감도 있고, 또 잘 퍼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위 기사를 쓰고 승인한 언론사와 한 가지 기준점이 다르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연루된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은 방 안에 있다고 느낀다. 기자가 노예로 전락했다고 표현한 중학생도, 인면수심의 성폭력 가해자인 범죄자도 우리와 같은 방안에 있다고 가정한다. 그렇다고 할 때, 노예로 전락했다는 표현은 그 사람이 함께 있는 방안에서 쓸 수 없다.


일전에 청소년 성착취 관련 문제를 취재할 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성착취 피해 경험자가 모자이크 된 자신의 모습을 뉴스에서 보고 또 보고 또 봤다는 것이다. 그 아래에 있는 댓글들도 내려보고 다시 새로고침을 해서 그 뉴스를 보고 모자이크 뒤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 확인했다. 그 과정이 그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청소년을 지원하고 있던 활동가 분은 절대로 다시는 피해 당사자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방 안에 있다. 때로 우리는 그런 사람은 우리 주변에 없는 양, 말을 막 하고, 맘대로 존재를 생략한다. 범죄 피해를 경험한 그 사람도 똑같이 인터넷을 한다. 언론의 기사를 읽고, 댓글을 본다. 나는 이후 기자협회에서 이 기사를 쓴 기자 한 분이 한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피해자를 구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열렬한 마음은 때로 위험해진다.


창작자의 자기 변명과 함정


많은 사람에게 가닿고 싶다-는 욕심은 콘텐츠를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쉽게 또는 재밌게,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 되었는지 - 화제성이란 하나의 기준이 나머지를 압도해서도 안 되겠지만, 많이 보여지길 바라며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서 힘을 얻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강조하고 싶은 건, 그걸 해내는 방법이 언제나 ‘자극적인 이야기’라는 쉽고 진부한 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좋아할 거라고 믿는 건 이야기 창작자가 서술자로서 내린 내적 결정이다. 그 결정은 자기로부터 나온 것이지, 세상이 그렇다고 말하며 자기 결정이 아닌양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 길을 만드는 방식은 얼마든지 더 창의적일 수 있다. 그런 고민을 할 자원이, 때로는 노력이, 때로는 타협하지 않는 끈기가 부족할 뿐이다.


어디까지 이야기할지 그 선을 정할 때, 창작자를 내적으로 가장 갈등하게 만드는 건 내 상상 속 청자의 모습이다. 이 청자는 어디까지 들어줄까. 어디서부터 흥미를 잃거나 이해를 포기할까. 독자 인터뷰나 설문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깥의 모습,조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듣는 내 앞의 청자가 되었을 때 어떨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결국 창작자가 또는 한 매체가 가정하는 그 독자의 모습이 이야기의 수준도 결정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내 앞의 100명의 청자가 과연 이 이야기를 어떤 수준의 인내심과 지식을 가지고 들어줄지 내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청자 탓을 하며 타협하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타협했는지, 그건 만든 사람 자신이 가장 먼저 알 수 있다.


결국 콘텐츠에는 만드는 사람이 자신이 상정한 가상의 ‘시민(청자)’와 대화하며 결정한 여러 가지가 반영된다. 그 대화가 잘 이루어져야 좋은 콘텐츠가 나온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걸 보여주고 끝나면 콘텐츠는 실패한다. 조회 수가 터지는 임계점에서는 항상 의견의 스펙트럼이 나뉜다. 지배적인 의견과 그에 대한 반대 의견, 그리고 격렬한 반대의견도 포함된다. 꼭 찬성- 반대의 의견이 아니더라도 영상에 나오는 것과 다른 경험을 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거나, 최근엔 달라졌다는 소식을 덧붙인다거나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달라붙을 수 있도록 이야기 자체가 ‘매체’가 되어야 그또한 더 널리 유통된다. 모두 격렬하게 동의하고 좋아하는 영상은 결국 고립된 우물일 수도 있다.


미디어 윤리가 중요한 이유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일을 망칠 수 있다. 사실을 놓쳐서. 중요하지 않은 사실만 부각해서. 취재 과정에서 선을 넘어서. 당사자를 이야기에서 소외시키고 상처 줘서. 출연한 사람을 지나치게 극화하거나 대상화해서. 자극적인 이야기로 상처를 줘서. 편집에서 맥락을 누락해서. 오해를 살 만한 단어와 비유를 선택해서. 프레임을 잘못 짜서 사람들이 엉뚱한 싸움만 하도록 해서. 해야 할 질문을 못해서. 핵심이 없어서. 재미 없게 만들어서. 잘못 인용해서. 그림이 뻔해서. 그냥 생각 나는 대로 나열만 해봐도 이렇게나 일을 망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 중엔 그냥 고치면 되는 일들도 있다. 그림이 뻔한 거나 맞춤법을 틀리고 검은 화면이 들어가고 이런 건 고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일들도 있다. 내 손을 떠난 순간부터 그 이야기가 갖는 파급력은 절대 사후에 통제할 수 없고, 고칠 수도 없다.


나는 이야기 만드는 사람들이 직업 윤리, 콘텐츠 윤리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을 망치면 그 파급력이 큰 업종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런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기를 바라서다. 나의 동년배들 중 언론사에 입사한 친구들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시기에 수습기자로 일했다. 언론이 얼마나 일을 망칠 수 있는지, 기자가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시기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야 했던 기자들은 필연적으로 많이 병들었다.


사회적 재난이 일어나는 자리에 가장 처음으로 도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 트라우마 스트레스학회의 재난충격 피라미드를 보면 첫번째는 희생자,생존자,현자의 목격자다. 이들이 가장 먼저 재난 충격을 경험한다. 두번째는 1차 경험자의 가족과 지인들이다. 그 뒤에 의료인과 소방관, 경찰, 응급구조사, 기자, 자원봉사자가 현장에 도착한다. 재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그 이야기를 편집해야 한다. 21년 언론인 대상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자들 10명 중 8명은 근무 중에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고 한다.


이런 상처는 은은하게 인생의 모습 자체를 바꾼다. 모든 언론인,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아프고 병들고 알콜 중독인 건 아닐텐데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왜 그랬까? - 언론인들은 왜 그렇게 다들 소맥을 잘 말고, 점심에 반주를 하는가? - 직업 환경의 문제도 있겠지만, 계속 강도 높은 마감을 해야 하고 감정 노동과 깊은 정서적 몰입을 경험하는 탓도 있다고 본다.


또 하나, 새롭게 알게 된 단어 중 하나는 ‘도덕적 상해’다. 도덕적 상해란 트라우마 용어의 일종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무너지면서 나타나는 트라우마 경험이며, 의료계에서는 ‘도덕적 손상’이라고 쓴다. 트라우마 반응이 만성적으로 바뀌면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과각성, 수면 장애, 부정적 사고란 설명은 언론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비추는 듯 하다.


● 만성적 트라우마 반응 : 극심한 피로 : 짜증, 비이성적으로 갑자기 화를 내고, 감정이 격해짐. : 혹은 반대로 웬만한 사건, 사고에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무뎌짐. (무감각) : 주변사람과의 관계가 악화되거나 주변으로부터 고립되려는 경향 : 매우 강렬한 공감과 감정 노동으로 “공감피로”로 이어질 수 있음.
→ 자신이 맡은 바를 잘 해내고 있지 못한다는 효능감의 저하 혹은 언론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제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제기를 넘어서 과도한 책임감을 느껴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더 돕지 못하는 상황 등에 회의를 느낌.
: 무력감, 죄책감을 느껴 일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 등의 증상을 보임. :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음. 트라우마가 만성화되면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이다” 같은 핵심 신념이 깨지면서 남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면역계 질환을 막는 일


매체를 다루는 일의 윤리, 직업 윤리를 고민하고 공동체에서 공유하는 일이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이건 면역계 질환을 막는 일이다. 언론의 중요한 역할은 알람 시스템 같은 것이다. 약해지거나 무너지는 곳을 알아차리고 반응해야 한다. 그런데 이 면역계가 미쳐 날뛰어서 과잉 반응을 하면 별 것 아닌 일도 자극적으로 포장하며 온 몸이 뒤집어지도록 만든다. 면역계의 과잉반응은 우리 사회에 불필요한 경계와 적대로 이어진다. 이런 불신이 늘어나면 만성 염증을 달고 사는 상태가 된다. 언론이 망가지면 소통이 안 되고, 서로를 신뢰하는 일도 더 어려워진다. 상처 회복에도 더 많은 시간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에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일을 하고, 토론하는지- 그리고 그걸 지켜나가기 위해 애쓰는지가 중요하다. 일을 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그 일이 만들어낼 결과 때문에라도 그렇다. 윤리적으로 일한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많이 고민하며 일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윤리 시험지의 정답을 맞추는 게 아니라 여러 번의 고민과 시도를 거친 결과물을 내놓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으면서 가장 고민되는 건 매체 환경의 변화다. 특정 직업군의 윤리를 강조하는 걸로 충분한 것일까? 모든 사람이 창작자다. 1000만명이 조회하는 밈을 만들어낸 사람은 그걸 스스로 직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윤리도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의 기능은 이제 플랫폼으로 분산되었고, 탈진실의 시대에는 악의 없이도 누구나 세상을 망치는 스피커가 될 수 있다. 1분짜리 AI로 정치인 얼굴을 합성해 유행하는 노래에 맞춰 춤추게 하는 숏츠가 돌아다닌다. 유튜브 시장에서는 이제 진실에서 벗어나고 막나갈수록 잘 벌고, 인정 받는 쪽도 아주 커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수감에 항의하며 공수처 차를 둘러싸고 부수던 시위대 앞에는 그들이 열광하는 극우 유튜버의 카메라가 있었다.


눈 깜빡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콘텐츠가 생산되고 진실 여부를 따져묻거나 윤리를 생각하기도 전에 퍼지고 또 휘발된다. 이제 소위 언론, 또는 논픽션 영역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만이 더 나은 윤리적 감각을 갖추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그걸로는 물난리에 바가지 하나로 온동네의 물을 퍼내는 격이다. 이제는 모두가 세상을 망칠 수 있는 미디어 생산자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미디어 윤리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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