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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니 Jun 03. 2017

대립군 (2017)

다음이란 것은 없다


현실에 타협하게 되고 마는 씁쓸한 우리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비교하지마 상관하지마 누가 그게 옳은길이래~ #내가걷는 이길이 나의길



대립군 (2017)

감독 : 정윤철
주연 : 이정재(토우 역), 여진구(광해 역), 김무열(곡수 역)


사는 게 참으로 팍팍하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소득의 5프로를 가지고서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나라, 가진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더욱 빼앗기는 나라, 지도자가 백성을 속이고 백성의 등골을 뽑아다가 곰탕을 끓여먹은 나라, 하루 중 자는 시간보다 많은 시간동안 일을 하여도 그에 대한 보수는 한 끼 식사 배불리 먹는 게 사치처럼 여겨지는 나라, 허리띠가 아니라 목을 조르는 지옥같은 나라.

영화 대립군은 이러한 현 시대의 문제를 전쟁 중의 조선의 모습으로 조명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팔자' 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나라가 망해도 팔자가 바뀌지 않는다던가, 무과에 급제해서 팔자를 고친다던가, 내 팔자는 임금이 될 게 아니었다 라든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함에 대한 감정이 담긴 저마다의 목소리로 내뱉어지던 팔자라는 단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 시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수저' 가 아닐까.


그나마 식솔들을 먹여 살리려면 대립질이라도 해야 하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닌 허깨비들의 처절한 삶은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터진 전쟁으로 나라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 된 것이다. 나라를 버리고 명으로 도망하는 선조는 눈엣가시같던 차남 광해에게 분조라는 명분으로 그 땅을 내버리듯 맡겼고, 철없는 광해는 두려움에 질린 채 강계로 향한다.

수차례 습격을 받으며 겁에 질려 칼도 허공에다 대고 휘둘렀던 광해는 이 짓거리를 그만 두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절벽아래 흐르는 물에 이런 자신을 속절없이 내던지고 싶었다.
산 한가운데까지 올랐지만 이 길을 가고 있는 자기자신은 없고 말도 안 되게 큰 조선이라는 허울만이 목을 옥죄여 오는 것 같았다. 물에 빠지려는 광해를 토우가 끌어냈지만 그는 다음 생에는 평부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리를 늘어놓기나 하는 것이다.

다음 생 같은 건 없습니다,


토우의 고약하리만치 거친 대답은 정신줄이 희미해져 있던 광해의 정곡을 찌르는 듯했다. 천하디 천한 대립질 하는 자나, 아비가 버린 나라를 떠맡은 자신이나 남 대신 이 지랄같은 전쟁을 끌어안고 있지만 다음이란 없는 것이다.

이 생이 처음부터 막힌 것 같지만, 다음이란 없다. 두려워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 처절함에 대해 영화는 독안에 든 새앙쥐모양 산성 안에 숨은, 세자와 피난민들의 극한의 두려움으로 묘사한다. 토우는 밑바닥의 거침과 잔인함이 아예 몸에 배어버린 사람이었다. 절벽을 등지고 싸우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 말하는 그의 야성에, 현실적이지 못하고 나약하기만 했던 광해는 이제까지도 부정해온 지금의 자신을 딛고 스러져가는 나라의 치욕적인 군주로서 마침내 결단을 내리기로 한다.

지금부턴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싸워보세


뭘 위해 이 처절함을 견디는가. 현 시대를 사는 우리도 전쟁터 위에 놓인 아슬아슬한 존재들이다. 먹고 살자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어느새 돈을 벌기 위해 먹고 사는 게 되어버린 수많은 개미들에, 광해의 결단이 기치가 되길 바란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우리 자신을 위해 이 처절함과 싸우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 없이, 끝도 없이 우리를 궁지로 내몬다. 마치 산성 밖에서 세자만 나오면 모두가 살 수 있다고 하는 곡수의 절박한 외침이 광해를 짓누르고 흔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위해 싸워보자며 투지를 불태웠으나 결국 세자가 투항하지 않는 한 방법이 보이지가 않았다. 광해는 정말 자신 하나 나가면 모두가 살 거라 생각했고 나가려 하였으나, 토우의 말은 달랐다. 내가 전쟁을 잘 아는데, 여기서 나가면 저놈들은 결코 모두를 살려주지 않는다고. 전쟁에서 그런 경우는 없다며 모두 죽이고 코를 베어갈 거라고. 이 궁지에서, 극한의 두려움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 밖에서 들리는 우리 자신의 소리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 소리가 진실일지 아닐지는 끝까지 싸워보기 전엔 모르는 것이다. 광해는 절벽끝에 서서 두려움을 견디겠노라 했고, 그 때 산성 아래에 땅굴에서 관군이 보낸 전령이 도착하여 의병 일백 명이 밖에서 진을 치고 있다는 구원같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거기서 투항해버렸다면, 그걸로 끝이었을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그때까지 이어져온 왕조의 세월만큼의 역사를 더 써내려온 나라가 되었다.


끝까지 싸워보기 전에는 모른다. 내 용기가, 아니 내 두려움이 얼마나 클지. 그 두려움을 견뎌낸 끝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 방법이 없을 때 들리는 소리가 끝도없이 내리눌러도,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가 버릴 수는 없다. 그때의 왜적처럼 지금 우리에게 돈이나 환경이나 사람이나 그 어떤 모습로든 막강한 대적이 고개를 들고 있을지라도, 언젠가 그 뿔을 꺾어버릴 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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