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 Jon Brion (Opening Song), Eternal Sunshine
진화 생태계 속에 있는 동물 중 인간은 유일하게 고도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길에 결국 우리의 ‘의식’이 함께 해야 한다면, 중요한 것은 ‘바르게 의식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다시 바르게 의식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앞서 논했듯이 인간의 의식은 결코 완벽할 수 없습니다. 철저히 기계화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의식인 동시에 더 나은 행동을 위한 ‘전제조건’은 우리 스스로를 – 그것이 개인이든, 조직이든 – '가능한' 객관적으로, 명확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 하게 그러지는 못할테지만요) 1970년대 발달 심리학자 존 플라벨_J.H.Flavell은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의식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메타인지_MetaCognition’ 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인지의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 안다는 뜻인데 메타인지는 ‘인지 너머_beyond의 인지’를 뜻합니다. 즉 인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하고, 이를 인식하는 고도의 정신작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개인과 조직이 스스로를 가능한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알 때 비로소 미래 앞에서 유연하면서도 강력한 자기자신과 조직을 만들 수 있고,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성장하는 인간, 상황적 인간, 도덕적 인간, 심리적 인간, 협력하는 인간을 조명하며 인간의 속성에 대한 이해를 강구한 것 역시 우리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속한 조직에 대해서 바로 ‘의식한 채’ 미래를 준비하자는 마음에 비롯한 것입니다.
메타인지는 교육, 학습의 영역에서는 이미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학습한다고 할 때, 그 무엇을 학습하면서 얻고 기억하는 지식, 정보가 ‘인지’라면 메타인지는 그 학습과정에서 내가 어떤 것을 알고, 또 어떤 것을 모르는지를 알고 어떻게 배울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행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성장하는 인간의 특징인 실패에서 배움을 얻고 성공을 위한 전략과 프로세스를 관리할 줄 아는 것은 다시 말해 높은 메타인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자기 자신을 조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뇌과학자들은 메타인지는 동물, 그리고 기술이 낳은 인공지능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인간 만의 고유한 능력이며, 메타인지 역시 학습과 훈련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메타인지’는 학습이라는 영역을 넘어서 좀 더 확장된 의미에서 ‘균형잡힌 자기인식’을 의미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는 두가지 범주로 나뉩니다. 한 축은 내적인 메타인지입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내면에 있는 가치와 열정, 포부, 나의 행동양식, 강 약점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축은 외적인 메타인지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아는 것입니다. 외적인 자기인식이 부족한 사람은 보통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평판을 모르고 있다가 타인에게 느닷없는 피드백을 받고 곤혹스러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인식은 직접적으로 연결된 속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적인 자기인식이 뛰어난 사람이 외적 자기인식도 뛰어날거라 예상할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지과학 연구에 따르면 둘은 독립적으로 작용합니다. 이것이 알려주는 시사점은 진정한 메타인지, 자기인식을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조직)을 아는 것과 또 타인(타조직)이 우리 자신(조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각각 이해하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한 메타인지’를 강화하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이미 논했다시피 자연스러운 우리의 인식은 제한된 합리성을 가지고 있고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 메커니즘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지 않는 이상 ‘메타인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허무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정확한 자기인식을 방해하는 오류에 대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심리적 인간 편]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선천적인 우리 안의 인식 오류에 대해 의식적으로 싸우고 동시에 ‘의식적’으로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겸손’한 태도를 갖춰야 합니다. 진정한 자기인식은 그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내적 메타인지를 위한 노력]
그런데 지금부터는 인식에서 더 나아간 훈련의 방법과 도구가 함께 필요합니다. 흔히 우리는 자기인식을 위해 ‘자기반성_self-reflection’을 촉구합니다. 자기반성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 동기, 행동을 의식적으로 검토해 ‘왜’인지 그 원인을 밝히고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조직 심리학자 타샤 유리크_Tasha Eurich는 연구과정에서 오히려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왜 자신이 현재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스트레스와 우울, 불안이 심했고 직업과 인간관계에 대한 만족도는 낮았으며, 자기몰입이 심했고 인생이 통제가 안되는 듯 하다고 느꼈습니다. 연구의 결론은 ‘왜’에 집중하는 자기성찰이 자기이해, 메타인지로 이어진다는 가설은 근거 없는 통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성찰은 때때로 자기지각을 흐려놓거나 왜곡시켜 뜻하지 않은 부정적 결과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불완전한 인지적 속성은 우리가 내면에 집중하려 할수록 우리 자신을 명확히 보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진정한 자기인식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의식할 때조차 ‘올바른 접근법을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선 ‘자기 성찰’이 객관적인 자기인식에 오히려 도움되지 않았던 이유는 현상 그 자체와 미래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반성 과정에서 과거에 벌어진 일과 그 해석에 집중하다 보면 우리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 안에 갇히게 될 위험이 큽니다. 반성, 성찰의 초점은 ‘배움’과 ‘실천’에 맞춰져야 합니다. 즉, 내가 무엇을 배웠거나 배울수 있고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과거과 현재를 있는 그대로 펼쳐놓고 관찰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해석 경로의 다양성’을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관범위한 감정과 행동의 뿌리가 단 하나의 진실, 경로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믿음 대신 내 상황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과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갖춘다는 의미입니다. 인지과학자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절대적인 답’을 추구하는 태도는 오히려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생산적인 시각을 찾거나 만들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자기인식을 방해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탐색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때 ‘왜’라는 질문을 많이 사용합니다. 왜라고 물을 때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라는 질문은 자기 자신의 메타인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게으른 뇌는 ‘왜’라고 물을 때 진실이 아닌 편향된 무언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고 우리는 다시 그것을 절대적인 답으로 인식해 더 이상 답을 찾기 멈출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가용성 휴리스틱에 빠져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건의 영향을 받아 답할 수도 있습니다. 또 ‘왜’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답을 위한 기준을 만들기 위해 재빨리 ‘닻’을 내리고 닻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지어낼 수도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때때로 우리의 전반적인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예컨대 자신의 실수, 실패에 대한 ‘왜’는 배움과 생산적 대응 대신 문제를 되씹어 생각하고 책임을 따지며 파고드는 행동을 넛징_Nudging 합니다.
‘왜’라는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반추_rumination’ 입니다. 반추는 우스개 소리로 요약하면 ‘술먹고 전화를 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반추는 우리가 ‘그때 왜 그랬지’와 같은 부정적 반성을 무한 반복하는 행위로 우리의 두려움, 단점, 불안의 생각이 최악을 향한 한방향으로 계속 흐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추는 우리를 정신적인 지옥으로 이끌 수 있을 뿐 아니라 생산적인 통찰을 막습니다. 반추는 단순한 걱정과는 다릅니다. 걱정은 주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반해 반추는 과거나 현재의 사건에 집중해 이를 계속 곱씹는 것에 가깝습니다. 반추는 얼핏 자기반성의 형태로 이것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자기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하게 만들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심리학 연구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쉽게 반추에 빠질 수 있지만 특히 우리가 특별히 중요한 일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때 반추에 가장 많이 빠진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반추는 정신적 측면에서 악순환을 야기합니다. 예컨대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반추에 빠지면 자신의 우울감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 결과 다시 더 깊은 우울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멈추려 해도 제대로 멈춰지지 않는 반추하는 사고로 인해 잠 못든, 불면의 밤을 보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라는 직접적인 질문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내적, 외적 자기인식을 높이지 못한다면 어떤 질문을 해야할까요? 심리학자 J. 그레고리 힉슨Gregory Hixon과 윌리엄 스완Willan Swann은 자신들의 연구에서 실험대상에게 ‘왜’ 현재와 같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묻기보다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고 말하게 했을 때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받은 대상은 자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변명하는’데 시간을 썼습니다. 반면 ‘어떤’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은 대상은 부정적 피드백도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본인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수긍했습니다.
타샤 유리크_Tasha Eurich 는 내적인 자기인식 –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메타인지 – 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왜’가 아닌 ‘무엇’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컨대 ‘왜 나는 그때 이런 실수를 했지?’ 보다 ‘나는 실수를 통해 무엇을 배웠고 (그걸 바탕으로) 이제 어떻게 하지?’가 더 도움이 됩니다. ‘왜가 아닌 무엇’은 문제에 대한 통찰을 키워줄 뿐 아니라 우리 감정도 더 잘 이해하고 관찰할 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감정과 관련해 우리에게 필요한 자기인식은 ‘해석’ 이전에 ‘관찰’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왜 이렇게 기분이 별로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대신 무엇을 통해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이렇게 우리 감정을 관찰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는 뇌가 우리를 과도한 긴장과 경직 상태로 데려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다만 ‘왜’라는 질문은 가능한 우리 안의 편향을 교정하고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복수의 사람이 존재할 때, 즉 조직의 관점에서 좀 더 유용합니다. 예컨대 기업 프로젝트의 실패 혹은 성공에서 ‘왜’, ‘인과관계’를 찾지 않는 행위는 오히려 조직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기업에서 ‘왜’라는 질문을 할 때는 가능한 ‘과학적 접근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해 ‘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집단적 사고의 오류에 흔히 빠집니다. 따라서 조직의 메타인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왜’라는 질문을 중요하게 다루되, 그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태도 즉, 근거에 기반한 과학적 접근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외적 메타인지를 위한 노력]
인간은 진화생물학적으로 ‘평판’의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동물입니다. 때문에 어쩌면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이를 외적인 메타인지라고 한다)는 어느정도 자동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나아가 오히려 그로 인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고 타인에, 조직에 속박되는 것 아닌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한 피드백’을 구하기 힘든 세상을 살고 있기도 합니다.
첫째, 우리는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타인이 나를 진실하고 솔직하게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피드백을 구할 용기가 부족합니다. 때문에 타인의 인정을 위해 지레 행동하다가 속박되거나, 특유의 자기중심적 편향 속에서 타인이 나를 보는 인식과는 다른 ‘전혀 다른 자신에 대한 생각’을 품습니다.
둘째, 우리는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해 진실하게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할 용기와 의지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조차 우리는 그런 정보를 알려주기를 망설입니다. 특히 그것이 부정적인 피드백일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외적 메타인지와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는 것이 곧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적 메타인지의 본질은 말 그대로 나 자신을 내적이든 외적이든 정확히 이해해 나의 앞으로의 사고와 행동을 ‘내 스스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관리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초점은 그저 ‘나에 대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진실을 파악한 이후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길을 갈지, 혹은 타인의 바람에 좀 더 부합한 길을 갈지는 독립적으로 선택할 문제일 뿐입니다.우리가 그것이 개인이든, 조직차원의 메타인지든 간에 외적 자기인식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오류는 ‘타조 효과_Ostrich Effect 입니다. 타조를 뜻하는 영어 Ostrich의 두번째 뜻은 ‘문제를 외면하려 드는 사람, 현실도피주의자’ 입니다.[1]
나쁜 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무의식 적으로 그런 이슈를 외면합니다. 연구자들은 우리가 스스로 설정한 가설과 모순되거나 반박으로 여겨질 부정적인 정보를 무시하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자칫 우리가 단지 ‘피드백을 구할 용기’를 못 내는 것을 넘어 타인의 비판적인 피드백 자체가 필요없이 자신의 상황 인식과 의식을 온전히 믿고 따라 주기만을 바라는 최악의 망상으로 우리를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개인보다 조직 차원에서 외적 메타인지를 구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집단 사고의 위험 때문입니다. 사회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_Irving Janis는 집단사고를 ‘응집력 있는 의사결정 그룹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대안 평가와 반대 의견을 억누르고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심리적 충동’이라 정의했습니다. 자율적인 문화의 조직에도 집단사고는 조직이 스스로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게 합니다. 더 나아가 독성을 띠며 그에 따라 집단의 비합리, 비이성적인 결정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문화를 통해 이루려는 것도 그렇고 조직의 응집력 자체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응집력 그 자체가 곧 절대 선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사회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조직의 응집력은 1)집단이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충분한 토의가 이뤄질 수 없거나, 2)조직 내 위험 혹은 압박에 의해 조직 구성원의 스트레스가 고조될 때, 3)권위적인 분위기(명령, 통제 중심의 리더십), 4)조직원의 사회적 배경과 관념의 동질성이 높을 때 집단 사고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어빙 재니스가 그의 저서 『집단사고groupthink』에서 밝힌 집단사고의 8가지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무오류의 환상: 집단이 절대로 실패, 잘못될 리 없다는 생각
2. 도덕성: 그룹의 동기는 본질적으로 훌륭하고 정확하다는 믿음
3. 합리화: 모순된 정보나 데이터를 중요하지 않다고 해명하려는 경향
4. 적에 대한 고정관념: 그룹에 반대하는 타집단을 ‘바보’로 매도하는 경향
5. 자기검열: 아무도 시키지 않더라도 스스로 검열하는 경향
6. 만장일치의 환상: 침묵은 동의와 같다는 믿음
7. 마인드가드: 그룹의 가정에 도전할 수 있는 정보로부터 그룹을 보호하는 자칭 사상, 이념적 경찰의 출현
8. 동조: 반대 의견을 배신으로 간주하는 경향
집단사고는 때로는 무의식적인 발현을 떠나 ‘의식적’으로 조장되기도 합니다. 그룹의 조화와 응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구성원들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신념, 생각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려 깊은 사람일수록 기본적으로 ‘타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라는 생각과 행동의 습관이 베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친구들 간의 식사 자리나 가벼운 친목 도모 자리에서 내 생각과 바람을 주장하기 보다는 타인의 취향과 타인의 기호를 듣고 거기에 맞추려는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사적 영역에서 사실 모두가 원치 않았는데, 서로 ‘원하는 것이 그것인 줄 알고’ 하는 행위는 생각보다 우리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고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공적 영역에서 일련의 사고와 행동이 습관화되는 것은 매우 곤란할 수 있습니다. 집단 사고는 때때로 조직에서 어떤 과업의 목적이나 대안과 같은 핵심 정보에 대한 불완전한 탐색 및 조사를 부추깁니다. 때문에 조직 내 위험신호에 둔감해지고, 이는 다시 조직 편견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집단사고는 자칫 조직 메타인지와는 정 반대의 결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어찌하면 우리 내면 깊숙하게 내재된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메타인지할 수 있을까요? 그 첫번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오만과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의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리적 인간 편>에서 밝혔든 인간은 제한된 합리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오만과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주로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인지적 오류를 범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의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태도가, 무엇이 메타인지를 막는 지를 의식하면 우리가 순간 전제군주를 불러내어 상황을 망쳤더라도 회고를 통해 그를 의식하고 좀 더 나은 다음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우리의 뇌는 가변적이고 우리는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더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언제든 ‘틀리고 잘못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겸손하고 열린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코의 ‘반(反)서재’적 태도를 갖추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믿음이 의심받을 때 더더욱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머릿속에 전제군주가 들어있어 실제 사실과 관련된- 하지만 내 평소의 관념, 인식과 다른 이야기가 들렸을 때 이를 ‘감정’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전제군주자아_totalitarian ego라고 부릅니다. 전제군주자아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위협적인 정보를 억지로 차단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럴 때 비판적 어투로 ‘정신승리’를 한다고 표현합니다.
조직 심리학자 아담 그랜트는 개인 혹은 조직의 어떤 생각, 시도가 성공할 때 우리는 그 성공 및 성공과 관련된 경험, 생각에 애착_Attachment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애착이 역으로 또다른 성공을 막고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우리가 ‘틀릴 수 있고’, 그랬을 대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배움을 얻어 더 나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틀렸을 때 틀렸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려면 두가지 종류의 분리detachment이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많은 사람들은 ‘변합니다.’ 즉,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미국 헤지펀드 회사 브리지워터의 창업자이자 그의 경영 철학을 담은『원칙Principle』 으로 유명한 레이 달리오_Ray Dalio는 아담 그랜트와의 대화 자리에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2]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런! 1년 전에 내가 그렇게 어리석었단 말이야?’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지난 1년 동안 그다지 많은 것을 새로 배우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의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즉 내 주장, 내 의견, 혹은 내 성공을 그냥 나 자신의 인격과 정체성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역으로 배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가진 어떤 신념을 자기 자신으로 규정해버리곤 합니다. 이것은 과학자 중의 과학자로 불리는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학계의 최고 지성과도 같았던 아인슈타인 역시 상대성 이론으로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이후 어떤 순간에선 ‘전제군주자아’를 불러들여 이후 또 한 번의 물리학의 도약을 이루는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반대했습니다.[3]
“나는 어떤 경우에도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담 그랜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자기 의견을 성스럽게만 여길 때는 자기 의견이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도 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성공을 했는 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생각의 태도를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어떻게 행동을 했는 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태도를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습니다. ‘열린 태도’ 를 가치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좀 더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견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의할 때 우리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우리 스스로를 변화,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매우 힘들겠지만요 (저조차도..)
메타인지를 위한 세번째 길은 제대로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태생적 오류 가능성을 의식하고, 열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20세기 초 정신적 고통에 대한 치료는 주로 지시적 요법이었습니다. 수술이나 약물의 처방 혹은 비약물적 처방이라 하더라도 의사가 환자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는 형태였습니다. 1940년대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이런 흐름을 뒤엎고 환자와 깊은 대화를 통한 치료를 꾀하는 비지시적 상담 치료 요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이를 ‘인간중심치료_PCT, Person-centered therapy’라 칭했습니다. 로저스는 인간은 경험하는 유기체로 기본적으로 자신의 말에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적 동기를 갖고 있다고 봤습니다. 또 인간은 누구나 현실을 각기 달리 지각하고 주관적인 경험이 행동을 지배하며 외부 현실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내부적인 경험에 의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뇌 과학, 심리학, 생물학이 밝혀낸 과학적 근거와도 일맥상통하는 맥락입니다. 이에 따르면 개인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개인적인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내적 참조 체제_internal frame of reference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우리 의도대로 판단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멈추고 그 사람이 어떠한 것을 바라보는 대로 그것을 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청의 핵심은 내가 아닌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맥락에 집중해 그의 욕구가 전제된 내용을 능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경청을 포함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메타인지를 위한 정보수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context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듣는다면 우리는 그냥 언어, 내용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표정과 어투, 당시의 상황, 상대방이 가진 경험 등을 포괄해 그의 의도를 유추하고 이끌어냅니다. 어떤 정보를 수집하고 학습한다는 것 역시 단지 활자를 읽거나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파악, 학습하게 된 이유,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 그때 가졌던 내 생각과 주변 환경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를 비로소 펼쳐 놓고 ‘분별’해 볼 수 있습니다. 분별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수용하고 변화할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 지속해야 할 것 등을 나누고 의식적인 변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그러자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직관, 그리고 시스템 1이 가져다 주는 효율과 힘이 크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시스템 2를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상황, 이를테면 중요한 의사결정이 필요하거나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쉬운 갈등, 위험, 충돌 상황이거나, 이를 수시로 혹은 정기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바르게 시스템 2를 불러내어, 바로 보고, 듣고, 분별하는 과정은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메타인지를 위한 마지막 길은 용기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우리는, 나는 신도, 로봇도 아닙니다. 인간은 끝끝내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평범한 인간으로써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메타인지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저 우리는 장기적 관점에서 조금씩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인생 전반에 걸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취약할 수 있습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분별한 결과가 결과적으로 나를 여전히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에 대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것에 열패감을 느끼기 보다 수용하고 다시 앞으로 한걸음 내딛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잠깐, 아직 끝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메타인지를 돕는 개인 차원의 노력과 태도를 다뤘지만, 우리는 ‘함께’ 함으로써 개인과 조직의 메타인지를 높일 수 있습니다. 혼자서 스스로의 메타인지를 이루는 것보다 누군가가 애정 어린, 진실한 시선으로 나를 진정성 있게 관찰하고 피드백을 줄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고 또 원하는 ‘관계’가 형성이 된다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메타인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 과학에서 특히 발달한 이 메커니즘에서 통상 이렇게 ‘관찰하고 피드백을 주는’ 이들을 ‘코치’라 부릅니다.
개인, 조직의 메타인지를 돕는, 그리고 나아가 촉진하는 생산적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당연히 ‘제대로 된 코치’의 역량입니다. 앞서 말한 5가지 혹은 그 이상의 메타인지 기술을 토대로 객관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경청하고 적절히 소통할 수 있는 코치가 필요합니다. 두번째는 개인과 조직이 코치의 필요성을 강력히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외과 전문의의자 영향력 있는 사상가, 작가로 꼽히는 아툴 가완디_Atul Gawande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일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두 가지 관점에서 탐색합니다.[4]
하나는 전통적인 교육학의 견해입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한 사회, 영역에서 공부를 하고 연습을 하고 배우고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와 스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스스로 사고하고 학습하는 습관을 심어 줌으로써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스포츠 영역을 필두로 조금 다른 견해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끝이 없다, 모두가 코치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도 코치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툴 가완디는 자신의 분야를 기준으로 이에 대해 숙고해봤습니다. 그는 얼핏 반감을 가졌다고 합니다. ‘내 수술실에 와서 나를 지켜보고 비판하라고 돈을 지불한다? 터무니없고 비효율적인 것이 아닌가?’ 그는 그것이 단지 스포츠의 방식이 아닐지 반문하면서도 다른 영역에서도 꼭 필요한 영역인지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먼저 특별한 훈련 방식으로 자기 주도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Itzhak Perlman’ 에게 물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왜 코치가 없나요?” 그가 말했습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항상 코치가 있었습니다.” 아툴 가완디는 재차 물었습니다. “코치가 항상 있었다고요?”, “그럼요, 제 부인 토비죠” 줄리어드 대학을 함께 졸업한 토비는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그의 전담 코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작 펄만은 토비의 피드백이 자기가 지금까지 이뤄낸 모든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고 했습니다. 주로 스스로 고도의 성취와 경지에 다다른 인물들을 재차 만난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메타인지를 돕는 코치가 영역에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던 도중 문득 과거 자신에게도 그런 과정이 있었음을 비로소 기억했습니다.
과거 그는 은퇴한 전직 은사에게 자신의 수술실에 들어와 자신을 관찰하고 피드백을 달라고 한적이 있었습니다. 도통 의사로서의 수술 실력이 제대로 늘지 않는다고 걱정하던 때였습니다. 가완디는 자신의 수술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필기로 가득찬 종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야.” “수술 중에 상처에서 빛이 뻗어나온 것을 알아차렸니? 너는 30분이라는 시간을 반사된 표면의 빛을 끄는 데 썼지.” “내가 발견한 또다른 것은 너의 팔꿀치가 가끔씩 공중에 들려. 너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거지. 외과의사의 팔꿈치는 항상 편안히 옆구리에 내려와 있어야 해. 팔꿈치가 들리는 것을 느끼면 다른 기구를 가져오거나 그냥 발을 움직여.”
아툴 가완디는 ‘코치’가 개인, 나아가 조직의 현실을 바로 보고 분별하고 성장함에 있어 매우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의 삶과 도전에서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코치, 그리고 그런 좋은 코치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코치는 자신의 바깥에서 내가 나를 정확히 보는데 도움을 주는 강력한 제 3의 눈과 귀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인도 정부와의 협업을 통해 120개의 출산 센터에 대해 코치가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를 실험했습니다. 절반은 코치를 두지 않고 절반의 센터에는 코치를 도입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관련한 출산 16만건을 조사했을 때 코치를 도입한 조직이 거의 모든 지표에서 우위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은 ‘조직’ 차원의 메타인지입니다. 개인차원의 노력과 집단 차원의 노력은 질적으로 여러모로 다르고 좀 더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합이 곧 조직이 되지 않는 것처럼 조직의 메타인지는 개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조직 그 자체 로서의 접근이 추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금껏 많은 조직은 ‘집단 사고’의 위험을 인지하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방지하는 동시에 조직의 현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나름의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때로는 외부 전문가 집단에 그런 조언, 자문의 역할을 맡기기도 하고 조직 내 일종의 ‘레드 팀’을 두어 조직이 단일 사고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려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단사고, 메타인지 불능을 방지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문화’화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메타인지를 위한 문화화에 실패한 조직은 아무리 외부 전문가 집단, 조직 내 전담 팀을 두어도 궁극적으로 오염되거나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초빙된 외부 전문가는 조직의 강력한 권위, 집단사고에 굴복해 오히려 집단사고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 쓰이고 조직 내 문제제기와 대안 제시를 담당하는 ‘레드 팀’은 어느 순간 고립되거나 낙동강 오리 알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조직의 현 주소를 있는 그대로로 보는 것이 얼만큼 중요한지를 이해한 기업들은 이 때문에 명령과 통제, 권위에의 복종이라는 전통적인 테일러리즘 문화를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고 급진적 솔직함_Radical Candor, 심리적 안전_Psychological Safety 등을 주창하는 새로운 문화로 탈바꿈하려고 합니다. 일련의 문화가 가진 목적은 단순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자유와 안전 문화 속에서 문제를 문제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진 다양성의 주체들이 조직과 조직이 내어놓은 생각의 실체를 더욱 현실적이고, 객관적이고, 생존과 성장의 토대를 더욱 탄탄하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화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문화화’를 한다는 것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기업 교육과 체험형 워크숍, 캠페인, 디자인 제작물 같은 소프트한 프로그램의 영역이라 여깁니다. ‘조직문화 담당자’ 역할 역시 그에 한정됩니다. 하지만 문화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문화는 결국 조직 구성원의 암묵적 생각과 철학이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며 나아가 그 행동과 행동이 맺는 관계,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상황, 현상의 총체다. 결국 문화는 결과입니다. 때문에 문화를 다룬다고 하는 것은 곧 그 결과를 위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장 핵심 주체는 결국 최상위 리더십입니다. 즉, 조직의 메타인지에 유리한 문화를 위해서는 최상위 리더십이 스스로의 오만과 편견, 나아가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오만과 편견을 경계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는 때때로 매우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런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은 때론 권력의 주체인 자신에게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최고 경영자는 자신이 자신의 오만과 편견에 의해 단일사고에 빠지고, 그로 인해 무조건 충성맹세를 하는 아첨하는 자들을 주변에 두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아마존 제프 베조스는 비즈니스 모델, 리더십 스타일 모든 면에서 다르지만 자신의 문제제기와 치열한 논쟁에 용기 있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을 중용하고, 그들로 하여금 조직의 현실을 직시하고 대응, 대비하는 것을 습관화, 문화화 하는 데 리더 스스로 전심을 다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아마존은 채용에서 가장 해로운 것 중 하나로 자신이 그저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채우려는 ‘개인 편향_Personal Bias’으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채용 및 팀구성에서부터 이를 경계하는 문화를 시스템화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마존은 과거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채용이 오직 ‘시급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편향’에 빠지기 십상이었고 그 결과 오히려 더욱 큰 비용을 치르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채용의 영역에서 시급성은 절박함을 낳고 절박함은 지름길을 택해 필수적인 프로세스를 무시하게 함으로써 끝내 파괴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점을 인식했습니다. 아마존은 시급성의 유혹과 편향을 극복하고 본디 그들이 추구해 왔던 강력한 원칙인 ‘높은 기준’을 가진 채 포지션의 상황 맥락에 부합하는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채용 과정에서 오직 ‘아마존의 원칙 부합 여부’만을 목표로 채용의 프로세스와 인터뷰 과정, 내용을 관찰, 코칭 하는 ‘바 레이저_Bar Raiser’ 역할 및 프로세스를 마련했습니다.
아마존에서 바 레이저는 모든 인터뷰 과정에 관여합니다. 인터뷰 프로세스가 잘 이뤄지고 있는지, 잘못된 채용 결정을 내리고 있지는 않는지 꼼꼼하게 살핍니다. 또 그들은 다른 인터뷰어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투입됩니다. 인터뷰를 직접 수행하기도 하고 인터뷰 기법을 코치하거나 인터뷰 결과 보고 회의에서 적절한 탐지용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편향이 채용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단속하는 한편, 지원자가 회사의 채용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 일을 합니다. 바 레이저는 상당 기간을 거쳐 인터뷰 프로세스의 모든 면에서 전문가 수준이 되도록 훈련 받습니다. ‘바 레이저 코어_Bar Raiser Core’라고 불리는 ‘고참’ 바 레이저 그룹이 이 프로그램을 관리하는데 대부분 임원급으로 구성되어 일련의 과정에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를 조직으로부터 요구 받습니다. 일련의 바 레이저들은 별도의 직무가 아니라 본 직무가 있는 직원 중 선발되어 관련 전문가 훈련을 받는 형태를 취합니다. 바 레이저가 된다고 해서 연봉이나 보너스를 더 받는 것도 아니고 일상 업무를 일부 면제받는 것도 아닙니다. 바 레이저로서 공식적으로 얻는 유일한 인정은 회사 사내 온라인 명단에 ‘아이콘’이 부여되는 인정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많은 구성원이 지원하고 또 훈련을 원합니다. 그만큼 아마존인들 스스로 채용의 중요성과 무게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조직 내 개인의 편향을 가능한 줄이고 각 지원자의 업무 본질이 리더십 원칙과 얼마나 일치하는 제프 베조스 및 임원급 리더십 스스로의 강력한 의지를 토대로 발현되어 조직 내 채용 과정에서 일종의 채용 메타인지를 돕는 ‘코치’ 역할을 합니다. 아마존은 또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선정 및 개발 과정에서 ‘워킹 백워드Working Backword’(거꾸로 일하기) 프로세스를 통해 자신들이 집단 사고에 빠지지 않았는지, ‘고객 경험’이라는 자신들의 핵심 가치에서 비껴간 가설과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시스템적으로 검증합니다. 워킹 백워드는 아이디어를 심사하고 신제품을 만드는 방법을 칭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단어의 뜻 처럼 달성할 ‘고객 경험’을 먼저 규정한 다음에 팀이 구축해야 하는 명확한 이미지에 도달할 때까지 이를 출발점 삼아 거꾸로 되짚어가며 반복적으로 일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아마존은 ‘PR/FAQ’(언론 보도자료/자주 묻는 질문과 답)을 주요 도구로 사용합니다. 즉 제품과 서비스를 추진하기도 전에 관련한 보도자료, FAQ를 미리 작성해 이를 고객 관점에서 지속 피드백, 검토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가설적으로 생각한 제품과 서비스가 시장 및 고객 요구에 부합할지, 가설에 허점은 없는지, 제품과 서비스의 이미지가 명확히 그려지는 지를 검증하는 것입니다.
2004년 아마존은 디지털미디어 조직을 창설하고 당시 온라인 유통 비즈니스의 축을 디지털 쪽으로 확장, 전환하기 위한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이 신사업 조직은 초기 모든 회사들이 그랬던 방식을 따랐습니다. 시장 기회를 파악하기 위해 벤치마크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아이템을 선정해 매출을 (긍정적으로 가정해) 시뮬레이션 하며 대략적인 모델을 구성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보고받은 제프 베조스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제프 베조스는 그 모델이 정말 현실적인 것인 지 그리고 그 현실이 정말 ‘고객에의 집착’이라는 아마존 가치를 타당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인지, 그것에 얼마나 구체적인 확신, 그 이전에 고민이 있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팀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제프 베조스는 팀이 새로운 제품과 사업, 서비스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채용과 마찬가지로 시급성의 늪에 빠져서 ‘제일 먼저 발견한’, ‘가장 편리한 길’로 내달리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제프 베조스와 신사업 팀은 이를 어떻게 제대로 시뮬레이션하고 논의할 수 있을지부터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공감한 것은 이미 발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계량적이고(하지만 사실상 희망회로가 담긴 가정)’ ‘시각적인 것’이 때로는 다른 진실, 실질적인 맥락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 보다 추진하고자 하는 제품/서비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담은 글 문서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깨달았습니다. 아이디어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팀은 제품의 특성, 가격, 작동방식, 고객의 선택 이유 등을 글로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했고 나아가 사전 보도자료 형식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들을 FAQ 형태로 정리해 자신들의 제품과 서비스를 고객 관점에서 객관화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워킹 백워드 프로세스의 주된 목적은 구성원의 시각을 내부적 관점에서 고객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과연 이 제품은 고객이 직접 행동을 취해서 구매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구성원들은 잠시 상자(내부자적 관점) 밖으로 나와서 스스로를 환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킨들’을 탄생시켰고, 이후 이 절차는 아마존의 공식 프로세스이자 문화가 되었습니다.
반복하지만, 우리는 명백히 ‘오만과 편견’이 가득한 개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개인으로서 그런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더라도 얼마든지 조직으로서 ‘오만과 편견’에 휩싸일 수 있음을 의식해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결함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내재된 ‘닫힌 성향’을 의식적으로 ‘열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문화화해야 합니다. 문화화하는 첫 출발은 기업 권력의 속성상 최고 경영자, 최상위 리더십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그런 측면에서 최상위 리더십 집단이 ‘메타인지’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와 의식, 행동이 없으면 조직은 ‘메타인지’하기 매우 어려워집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직에 메타인지를 자극하는, 나아가 집단 사고를 예방하는 견제장치가 제도화, 시스템화 되어야 합니다.
[1] Oxford 영어사전 기준, Ostrich의 두번째 뜻이다
[2] How to Love Criticism, Worklife with Adam Grant, February 28, 2018
[3] 양자 역학이론을 발표한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은 당사자 뿐 아니라 그를 계승하는 과학자들까지 이어져 매우 긴 시간동안 계속되는데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논쟁을 추적 하다 보면, 아인슈타인이 우리 뇌의 시스템 1을 활용해 ‘양자역학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관을 바탕으로(하지만 뚜렷한 근거나 합리적인 이유는 없는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를 입증하는데 때로는 무모하리 만치 전력을 다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집요한 반박과 반대는 (비록 반대입장을 일단 정하고 뛰어들었더라도) 다행스럽게도 철저한 과학적 논증, 사고실험의 성격을 띠었고 그 자체만으로 오히려 양자역학의 논리는 방어과정에서 더욱 탄탄해 졌다.
[4]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Want to get great at something? Get a Coach, 2017 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