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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Dec 28. 2023

헤엄치다

자서전 5

바다에 뛰어들자마자 수압이 느껴졌다.

거센 물살에 살갗이 짓눌렸다.

내 서명이 이렇게나 중요했던 적이 또 있던가?

심지어 은행이나 보험 서류에도 이토록 신중을 가하진 않았던 것 같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은 '별 거' 아니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별 거'였다.

이젠 진짜 끝, 아니, 시작이었으니까.


계약을 마치자 편집자가 배정되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는 시간이 없어 메일이나 전화통화, 문자로 미팅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 작품을 함께 이끌어갈 편집자를 내 눈으로, 직접 대면하고 싶었다.


오래 글을 쓰다 보면 출판사와 작가의 힘겨루기에 대한 일화를 많이 듣게 된다.

사회적으로 우세한 쪽이 상대를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출간이 처음이었던 나는 특히나 걱정했고, 매우 긴장된 상태로 미팅에 나갔다.

나른한 점심시간을 지나 만난 편집자님은 다행히도 좋은 분이었다.

내 소설을, 소설 속 인물들을 보듬어주고 다독여줄 감수성이 풍부하신 듯했다.

어영부영 메일로 넘어가지 않고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완고본이라서 더 손댈 게 없어요.
작가님이 쓰시는 대로 피드백만 드릴게요.

수정 방향에 대한 논의를 위해 나는 꽤 많은 준비를 했다.

의견을 수용할 자세를 취하면서도, 때에 따라 강경하게 나서야 할 때를 대비했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편집자님은 주장보다 질문을 더 많이 했다.

계약 전부터 수정하기로 합의했던 챕터가 있었는데, 그 부분마저도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대략적인 제시만 하셨을 뿐, 세세한 이야기나 감정선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등 떠밀릴까 봐서 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나갔다가,

오히려 너무 안 밀어주어서 내가 직접 다이빙을 하고 온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글자의 바다.

늘 헤엄치던 곳이었는데도, 평소와는 다른 설렘이 느껴졌다.

그저 수평선을 향해 무작정 헤엄치던 이전과는 달리,

꼭 도착해야만 하는 섬이 있는 기분이랄까.

조금 더 힘차게 발을 굴렀다.

글자의 바닷속에서 나는 헤엄쳤다.

참방참방, 물이 흩뿌려지며 하얀 거품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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