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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Dec 29. 2023

빠뜨리다

자서전 6

없어졌다, 분명히 있었는데.

A4 열댓 장 분량의 내용을 수정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글자는 이전의 서투른 모양으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말끔하게 다듬었던 문장들을 물에 빠트려 버린 것이다.


다른 때는 덤벙대고 칠칠맞은 사람이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꽤나 신중하다.

한 번 써놓은 문장은 다른 문장으로 대체하기 전까지 절대 지우지 않는다.

그래서 초안은 항상 더럽다.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별로라고 생각이 들면 일단 엔터를 치니까.

아래로 글자를 미뤄두고는 같은 문장을 다시 쓰면서 조금씩 다듬는다.

그래서 초안에는 같은 문단이 여러 번 반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생각이 번득이면서 마구 수정하는 때도 있다.

마치 글자가 나인 듯, 내가 글자인 듯, 글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생각이 글자로 고스란히 전달되는 순간은 나조차도 자주 겪지 못하는 현상 중 하나다.

그런데 마침 딱 시기가 맞아떨어져서, 한 회차를 통으로 그렇게 수정했다.

몇 시간이 뭐야,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완성되었다.

만족스럽게 저장을, 그래, 저장 버튼을 눌렀던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런데 하필 그 부분이 심해로 가라앉은 것이다.


복사본을 만들고, 수정 이력을 뒤로 돌려도 보고, 저장한 다른 파일을 살펴도 보고...

복구하려고 별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냥 없었다.

머리는 '이미 사라진 거잖아, 그냥 빨리 다시 쓰는 게 나을 걸?' 했지만,

마음은 알게 뭐냔 식으로 날뛰었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시신경을 마구 자극해서, 결국 눈물이 터졌다.


'어떡해' 하고 속상해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소중히 만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그 상실감.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문장이었다.

친절히 내게 다가왔던 어여쁜 글자와의 헤어짐이, 내겐 너무나도 아팠다.


잠결에 적어놓은 글마저 삭제하지 않는 내게

열댓 장이 넘는 글자의 소실은, 큰 타격이었다.

다시 쓰려고 해도, 떨어진 글자가 남긴 기포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기억으로 남았던 공기 방울마저 터지며, 글자는 점점 심연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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